영화관의 추억은 별로 없다
혹시 '삼남'이란 말을 아시는지?
당연히 아실 것이라 믿는다. 왜냐하면 우리 모교의 교가 첫머리에 나오는 단어이기 때문이다.
'삼남에 으뜸이라, 만경벌 여기, 기름진 솜리 따흔 마한의 금마~'
그러면 '삼남'의 뜻을 아시는지?
이것도 아시리라 생각한다.
우리가 그 어린 시절을 보내던 전라도를 포함하여,
충청도와 경상도까지를 통틀어 일컫는 말이다.
그때는 제주도 역시 전라도에 속해 있긴 하였으나,
개념적으로는 바다 건너까지를 말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삼남이 풍년이면 천하는 굶주리지 않는다'란 말이 있다는데,
이 지역에 곡식이 많이 난다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물론 그 중에도 당연히 전라도의 물산이 풍성함은 따로 말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하여튼 '삼남'이란 말에 붙어 있는 그와 같은 풍성함과 넉넉함의 뉘앙스가
잘 어울리는 친구가 있었다.
인순이...(이번에 가입한...)
지금도 남자 동창들이 아마도 제일 부담 없이 대하는 여자 동창이
바로 김인순일 것이다.
카페 가입 인사에서 본인도 언급했듯이,
인순이는 삼남극장집 따님이다.
초등학교 때에 나는 중앙시장 신광철물점(박인숙이네)에서
세를 살았고, 인순이는 신광철물점집 뒷골목으로 한 20미터 쯤 들어가
장마당을 끼고 있던 주택에서 살았다.
정원도 넉넉하고, 꽃들도 피어 있는 아름다운 곳으로 기억한다.
다리가 아파서 수술을 받는 등 많은 고생을 했지만
인순이는 늘 웃는 얼굴이었고, 밝았다.
그 옛날에도 남자애들이 큰 부담없이 말할 수 있는 상대였다.
인순이 덕에 삼남극장에서 공짜 영화를 본 친구들이 적지 않을 것이다.
물론 나는 쑥맥이어서 가까이 살았음에도 공짜 영화의 기억이 없다.
오늘날에는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지만
삼남극장이 유명했던 것은 바로 1977년 11월 11일의 이리역 폭발사고 덕이었다.
공식적으로 50여명의 사망자가 났던 그 사고 당시에
삼남극장에서는 하춘화의 쇼가 벌어지고 있었다 한다.
지금은 고인이 된 코미디언 이주일 씨가 당대에는 무명 사회자였는데,
폭발의 여파로 지붕이 무너져 내린 삼남극장의 무대에서
하춘화 씨를 업고 나왔다는 일화가 전국적으로 퍼졌던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삼남극장의 추억은 오로지 한 가지 뿐이다.
바로 영화관에서 프로레슬러 김일의 경기를 관람한 것이다.
김일이 삼남극장에서 경기를 했냐고요?
아니, 그것은 일종의 중계방송이었다.
물론 생방송(live)은 아니었고, 경기 장면을 필름에 담아서
영화관을 순회하며 보여준 것이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임검석'에 관한 것이다.
옛날 영화관에는 임검석이란 게 있었다.
근래에 나는 이 말을 아는가, 모르는가로 세대를 구분해 보기도 한다.
경찰관이나 학교 생활지도부 선생님들이 극장 안의 질서를 잡는다는
목적으로 객석의 뒷쪽에 의자 두 개씩 붙여 놓은 곳을 말한다.
더러는 어두컴컴한 극장에서 불건전한 짓을 하는 것을 단속하기도 했다지만,
대부분 나이를 속이고 몰래 들어온 학생들을 단속하는 용도였을 것이다.
지금도 궁금한 것은
극장집 딸 인순이는 영화 보는데 그런 제약이 없었는가 하는 것이다.
자기 맘대로, 언제든지, 공짜로, 좋은 좌석에서(옛날에는 지정석이 없었으니까)
영화를 볼 수 있었을 텐데 말이다.
물론 고무신집 아들은 신발이 떨어져서 덜렁거릴 때에야
겨우 한 켤레 얻어 신을 수 있었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