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노인의 몸무게
한 보름 전쯤의 일이다.
저녁에 늘 하던대로 아내와 산책을 나갔다.
산책이라기보다는 한 시간 정도 열심히 걷는다고 하는 것이 좋겠다.
보통 효자촌 우리 집에서 1.5km 정도 떨어진 율동공원으로 가서 역시 2km 정도 되는 호수 주변 산책로를 돌아오곤 했는데, 그날은 추워서 그 반대방향인 서현역 쪽으로 가기로 했다.
시범단지 쪽으로 해서 우성아파트를 지나 횡단보도를 건너려고 하는데, 할아버지 한 분이 지팡이를 짚고서 서성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조금 이상한 느낌에 다가가서 어디 가시느냐고 물으니 횡단보도를 건네달라는 말씀을 하신다.
노인은 발걸음조차 제대로 내딛지 못하고 있었고, 말씀도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원래 곱상하던 분 같은데 얼굴엔 검버섯이 피었고 피부에 진기가 빠져버린 분이었다.
체구도 자그마했다.
아, 아버지...
아버지가 생각났다.
아버지는 지팡이 짚기를 싫어하셨는데, 이 노인은 그래도 지팡이는 잘 챙기시는 분 같았다.
노인의 옷차림은 이제 방금 잠자리에서 일어난 수준이었다.
맨발에 잠옷 바람으로 나온 것이다.
집이 어디냐고 물으니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이 우물거렸다.
그래서 일단 본인이 원하는 대로 횡단보도를 건네드리기로 했다.
집을 찾아서 가족에게 가는 것이 우선이었다.
노인을 모시고 느릿느릿 횡단보도를 건너다 보니 도로 중간도 채 못 왔는데 그만 빨간 신호로 바뀌어 버렸다.
차량 통행이 그리 많지는 않은 곳이지만 저녁이라 위험했다.
겨우겨우 다가오는 차를 향해 손짓을 하며 건너가기는 했지만 막상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했다.
나는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경찰지구대로 일단 노인을 모시고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노인에게 아파트 이름을 물어도 모른다고 하고, 전화번도를 물어도 대답을 제대로 못하고, 아내와 내가 번갈아 물었지만 반응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혹시 몸에 연락처가 적힌 쪽지라도 있는지 알아보려는데, 주머니에서 막상 꺼낸 것은 손수건 한 장 뿐이었다.
노인은 연신 흐르는 콧물을 닦았다. 한기의 영향을 그대로 받은 것이다.
노인을 업기로 했다.
막 업으려는 순간에 저쪽에서 '할아버지!' 하는 소리가 들렸다.
우리가 건너온 횡단보도에서 할머니 한 분이 이쪽을 바라보며 반가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할머니에게 겨우 사정을 들어보니 이미 지나쳐 온 우성아파트에 사시는 분이라 한다.
할머니 말씀을 안 듣고, 잠깐 안 보는 사이에 할아버지가 집을 나간 것이라 한다.
노인은 올해 84이라 했다.
할머니는 그런 일에 단련된 듯 담담하게 말씀하셨다.
날이 워낙 춥고, 또 노인이 걷기도 힘들어서 아예 데려다 드리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내친 김에 노인을 업었다.
그리 무겁지 않았다.
아버지의 몸무게가 느껴졌다.
돌아가시기 전날 전주 병원에 갔을 때, 느꼈던 그 기분이 덜컥 들었다.
노인은 자기 아파트가 보이니 그제야 정신이 깨어난 것 같았다.
이제는 어느 쪽으로 갈 것인지를 등 뒤에서 지시하신다.
230동 9층에 사신다 한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속으로 '거참!'하고 탄식했지만, 그래도 다행이다 싶었다.
엘리베이터 안까지 겨우 모시고 가서 내려 드렸다.
그리고는 엘리베이터 안에 계신 할아버지를 향해서 '할머니 말씀 좀 잘 들으세요!' 신신당부를 했다.
돌아가시기 전에 아버지에게 늘 채근대던 우리의 바람이었다.
'제발 어머니 말을 들으세요!'
시간도 많이 되었고, 그만 하면 운동도 제법 한 셈이었다.
내 몸도 많이 데워졌다.
그래서 그냥 되짚어 집으로 왔다.
등에는 깡마른 노인의 몸무게가 여전히 유지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