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이야기

장기 휴업에 들어간 이발소

써니케이 2007. 12. 17. 09:26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에 생긴 변화 한 가지는 내가 운영하던 이발소에 손님이 한 사람 줄었다는 것이다.
아니, 근래에는 아버지가 유일한 고객이었으니, 더 이상 이발소를 운영할 수 없게 되었다.
휴업 상태인 것이다

80 넘어서는 내가 아버지 이발을 해 드렸다.
중학교 다닐 때는 바리깡으로 박박 밀었으니 누구라도 이발사 노릇을 할 수 있었다.
(다만, 머리 뜯어먹는 일만 없다면)
그러나 이발소가 시들해지고, 미장원이 성업을 하면서부터는 머리 모양에서도 스타일을 찾게 되니 아마추어 이발사가 설 자리는 없게 되었다.
아이들이 아주 어렸을 때, 머리를 조금씩 손질해 준 것 외에는, 그러다가 아람이가 어느날 "내 머리 내놔!"라고 항변한 이후로는 더 이상 바리깡을 가까이 하지 않았다.

미국 생활을 하면서 조금의 변화가 있었다.
우리 살던 곳에는 교포들이 없어서 오로지 미국 바버숍을 가야 했고,
다음 몇 가지 이유로 우리 식구들은 나에게 자신들의 머리를 맡기게 되었다.
1. 영어로 머리를 어떻게 깎아달라고 말하기가 어려웠다.
2. 미용 요금도 비싼데다, 팁까지 줘야 한단다.
3. 미용사들의 솜씨가 영 만족스럽지 못하다고 한다.
4. 한국 사람 머리는 미국 사람들에 비해 뻗세어서 미용사들이 싫어한단다.
5. 미장원 가는 데도 차를 끌고 가야 하니 좀 귀찮다.

머리 모양에 관한 한 까다롭기 짝이 없는 여름이를 비롯해서, 아람이, 그리고 전 교수 아들 상진이,
한참 후에는 아내까지도 내 미용 실력 상승의 희생 제물이 되었다.
아마도 우리가 1년 여를 사는 동안 절약한 미용 요금만 해도
족히 1천불을 넘으리라 생각한다.
머리 깎는 것은 괜찮은데, 사실 뒷처리가 고약하였지만,
그런대로 내 미장원은 성업을 하였다.

처음 아버지 머리를 손대게 되었을 때,
나는 저윽이 놀랐다.
하얀 털이 힘이 없이 이리 쓸리고 저리 쓸리는 것이 참 안되어 보였다.
삼손의 힘의 근원이 그의 머리털에 있었듯이 사람이 늙으면 머리칼조차 힘을 잃는 것이었다.
대머리는 아니었지만 그래도 숱이 다 빠져서 헤성헤성했지만 아버지는 머리카락이 일정 수준 이상 자라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셨다.
늘상 어머니에게 머리 깎아 달라고 채근대셨다.

한번은 아버지 머리 깎고 나서,
요금을 달라고 했다.
박사 이발사가 깎았으니 돈을 많이 주셔야 한다고 했다.
그랬더니 아버지 왈,
"면허도 없는 놈이 무슨 소리냐?" 하셨다.
아버지는 그렇게 다 늙어 힘이 빠졌어도, 얼굴에 웃음기가 다 사라져 버리긴 했어도, 조크를 잃지는 않으셨다.
그리고 얼굴에 피어난 사마귀를
피부과에 가서 지질 정도로
단장에 소홀하지 않으셨다.

저 하늘나라에서
아버지는 오늘도 깨끗하게
말끔하게 계실 것이라 믿는다.
어쩌면 다시 만나는 날에는
아버지가 내 머리를 깎아 주실지도 모른다.
그때 우리 이발소 문짝에 붙인 '장기 휴업' 간판을 떼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