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이야기

우리의 영역은 하늘에 가까웠다

써니케이 2009. 2. 17. 23:07

우리의 영역은 하늘에 가까웠다

 

야생 동물들은, 아니 야생의 본능이 조금이라도 남아 있는 애완동물들이 골몰하는 작업이 있다. 바로 영역의 표시다. 영역이 넓은 놈이 먹잇감을 얻을 수 있는 확률이 높고, 예쁜 암컷을 꿰찰 수 있는 기회가 많다. 그래서 자기 행동반경을 조금이라도 넘어가기만 하면 영역 표시를 하느라 분주하다. 행여 다른 녀석들의 흔적이라도 느껴지면 그걸 지우느라 안달이 난다.

동물의 영역 표시는 흔히 체취로 한다. 나무에 자기 냄새가 묻어 있는 터럭을 문대기도 하고, 타액을 뱉어내기도 하지만, 제일 흔한 방법이 방뇨하는 것이다. 워낙 후각이 발달해 있는 존재들이기에 오줌 냄새만으로도 DNA를 구별해 내는 모양이다.

 

고등학교라는 삶의 터전에서 과연 ‘영역’은 무엇일까? 우선 반마다 차지하고 있는 교실이 있다. 교실은 반 구성원들만이 공유하는, 그러면서 배타적인 공간이다. 아무리 넉살이 좋은 친구라도 다른 반에 무상으로 출입하기는 그리 간단치 않다. 뭐 다른 반에 들어간다고 해도 물어뜯길 일은 없지만, 그래도 뭔가 꺼려지는 곳이 다른 반 교실이다.

좀 음침한 곳을 좋아하는 친구들은 학교 건물들 틈바구니의 어떤 곳을 자기들끼리 아지트로 정해 놓기도 한다. 그런 곳에 제삼자가 불려가기라도 한다면 적지 않은 곤욕을 치를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우리 모교에 그런 공간이 있었는지는 나는 잘 알지 못한다.

미술반 친구들은 미술실을, 브라스밴드 단원들은 음악실을 자신들의 영역으로 삼았다. 내 영역은 교실 말고도 두 군데에 더 있었다. 하나는 학보 편집실이고, 다른 하나는 방송반 부스였다. 2학년 때였는지, 3학년 때였는지 확실치는 않으나, 우리에게는 새로운 영역이 생겼다. 바로 방송반 일을 하다가 발견한 미지의 땅이 우리의 새로운 영역이 되었던 것이다.

 

방송실은 본관의 입구 현관 한쪽에 설치된 캐비닛으로 충분히 구성되었다. 메인 앰프로는 일제 산수이 앰프가 있었고, 몇 개의 마이크 입력 단자와 턴테이블 입력 단자로 구성된 믹서가 있었다. 그냥 그것뿐이었다. 조회 시간에 마이크와 스탠드를 운동장에 설치하고 볼륨을 조정하는 것으로 방송반의 임무는 완성되었다.

가끔씩 마이크 선의 접촉이 불량할 때는 전기인두를 잡기도 했지만, 거의 다른 일은 생기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날인가 스피커가 말썽을 일으켰다. 스피커는 4층 옥상에 설치되어 있었는데, 기다란 혼이 부착되어 있는 철제 스피커였다.

굳이 외부 기술자를 부를 필요 없이 나는 용기를 내서 직접 수리를 하기로 했다. 왜 용기를 내야 했는가 하면 옥상에 접근하는 것이 용이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옥상에 가려면 4층 음악실의 창문을 열고 그 바로 옆에 설치된 철제 사다리를 타야만 했다. 만일 사다리에서 미끄러지기라도 한다면 2층 지붕으로 추락하게 되었다. 그러나 약간의 주의만 기울인다면 별 문제는 없을 만한 그런 상황이었다.

 

한번 출입을 하고 나니 가끔씩 올라가보고 싶었다. 옥상에 올라가면 바로 멀리 농림고등학교도 보이고. 그보다 더 멀리 배산도 보였다. 옥상에 접근하는 것은 거의 방송반에게만 허용된 특권이었지만, 한두 차례 지나고 나서는 몇몇 친구들이 등정에 동참하였다.

높은 데 올라가면 누구랄 것도 없이 비록 산에 오른 것은 아니지만 ‘야호!’ 소리라도 질러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다. 너무 티 나게 하면 선생님들께 발각될 우려가 있어서, 마음껏 소리를 지르지는 못했다. 하지만 새로운 공간을, 가장 높은 공간을 우리의 영역으로 확보했다는 흥분을 감출 수는 없었다.

해천이도 등정팀에 포함되어 있었다. 해천이는 다소 시간이 흐른 후에 동물적 본능을 본격적으로 발휘하였다. 방뇨! 그는 자기 물건을 꺼내서 시원스런 물줄기를 만들어 냈다. 비록 어느 누구도 그 오줌의 DNA를 알아챌 수는 없었겠지만 방뇨의 당사자에게는 여간 가슴 뛰는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날 그 하늘에 가깝던 우리의 영역은 오래 가지 못했다. 아무래도 학교 당국으로서는 학생들의 안전사고가 염려되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다. 캠퍼스가 송두리째 소라단으로 옮겨가는 바람에, 남성고등학교의 멋진 붉은 벽돌 건물은 이제는 사진으로만 남아 있을 뿐이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고교시절의 모든 영역은 옥상을 포함하여 이제는 지구상에서 완전히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 김병선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