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이네 집에서 보던 플랑크톤
“화개 장터”를 부르는 가수와 이름이 똑같은 친구가 있다. 동이리 근처에서 시멘트 벽돌 공장을 하던 집이었다. 학교에서 동이리까지는 거리가 얼마나 될까? 자동차로 가더라도 20분 가까이 걸리지 않을까? 10리까지는 안 되더라도 5리보다는 훨씬 멀었다. 그때는 시내버스도 없어서 영남이네 집을 가는 일이 여간 큰 행사가 아니었다. 어느 날, 우리는 단체로 그의 집을 방문할 일이 생겼다. 그 집에 TV가 들어왔다는 것이다. 아마 이리시에서는 거의 처음 일이 아니었나 싶다. 영남이네보다 부잣집 친구들이 있었을 테지만 아무도 자기 집에 TV 들여놨다는 얘기를 한 적이 없으니 그 집이 처음은 맞을 것이다. 요즈음 저녁 8시반에 연속극을 보듯 당시에는 라디오 드라마를 듣는 것으로 문화활동을 대신했다. 라디오를 켜놓고, 식구들이 마당에 펴놓은 평상에 느러누워 모깃불에 콜록콜록 기침을 하면서 스릴과 서스펜스를 느끼곤 했던 것이다. 한 7,8명쯤 영남이네 집 안방에 모였다. 학교 끝나고 곧 바로 갔으니, 아직 방송 시작 시간이 아니란다. TV는 벽장 안에 들어 있었고, 우리는 TV에 눈높이를 맞추느라 모가지를 길게 빼고 시간이 되기만을 고대했다. 시간이 되었단다. 우리는 숨을 죽였다. 영남이가 전기를 넣어 주었다. ‘치직’ 하면서 브라운관에 퍼런 불이 켜졌다. 잔잔한 파도 같은 것이 넘실댔고, 스피커에서는 파도 소리 같은 시끄러운 소음이 들렸다. 영남이 말은 아직은 방송이 시작 안 했나 보다고 했다. 우리는 좀더 기다리기로 했다. 언제 시작될지 모르는 방송이므로 TV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10분이 지나 20분을 넘길 무렵에 아무래도 오늘 방송이 안 되나 보다고 했다. 우리는 무척 실망되었다. 처음 시작한 방송이 매끄럽게 잘 진행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를 초대한 영남이도 대략 난감했다. 우리는 하릴없이 그 먼 길을 되짚어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때 누군가 말했다. “얘들아! 지금 방송하는 거야!” “뭐라고?” “지금 나오는 거는 바로…” 그때 우리는 플랑크톤에 대해서 배우고 있었다. “플-랑-크-톤이야!” 정말 그랬다. 퍼런 바다에 물결이 흔들리고, 해안선을 쓸고 가는 물살의 소음이 들리는 가운데, 작은 생명체 같은 것들이 온 바다에 가득하게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TV는 그 바다를 담아 놓은 일종의 어항이었던 셈이다. 아이들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그러나 이내 다들 공감을 표시했다. 영남이의 입도 벙글어졌다. 다소간 멋적었지만, 나의 재치에 스스로 만족하고 있었다. 우리는 한결 가벼워진 발걸음으로 어둑해진 동이리를 떠날 수 있었다.
영남이네 집의 TV에는 아직도 그 플랑크톤의 후손들이 잘 살고 있는지 무척 궁금하다. 어항이 무척 얇아지고 엄청 커져서(LCD, PDP) 벽에 걸려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 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