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 네 녹음기, 결국 망가지다
처음 조직되었던 학생회에서 회장을 했고, 처음 총동창회에서도 회장을 했던 정기 네 집에도 TV가 있었다. 다른 집에는 겨우 12인치 TV가 있었으나, 그 집에는 훨씬 더 큰 TV였다. 정기와는 고등학교까지 한 학교에 다녔는데, 큰 TV는 초등학교 때 있었던 것은 아닐 것이다. 한번은 그의 집에 갔었다. 워낙 가까운 데 살고 있었고, 정기와는 자주 어울려 놀았었다. 중앙시장을 벗어나 이리여고로 통하는 길목에 있는 첫 골목의 첫번째 집이었다. 크진 않지만 정원이 있었고, 집이 큰데가가 잘 정돈되어 있었다. 그 근방에는 이중각 교장님, 남성여고에 계시던 장 선생님(장양 아버님) 등 남성재단에 관계하시는 분이 몇 분 사셨다. 정기 아버님도 남성의 서무과장을 지내셨다. 어린 기억에도 참 젠틀하신 분이셨다. 거실에 놓인 TV에서는 축구 중계 방송이 나오고 있었다. 엄청나게 큰 화면에서 선수들이 빠르게 움직이니 정말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어지러웠다. 그 화면의 크기는 아마도 19인치쯤 되었을 것이다. 정기 네 집에 가서는 언제는 그 집의 사는 풍경에 주눅 들곤 했었는데, 어지러움은 도저히 견디기 어려웠다. 정기 네 집에는 나를 유혹하는 물건이 있었다. 작은 녹음기였다. 카세트 녹음기가 아니라(카세트 녹음기는 아직 나오지 않았을 때였다.) 작은 릴 녹음기였다. 스위치를 돌리면 삐꺽삐꺽 돌아가면서 테이프가 한쪽으로 감긴다. 녹음 음량을 나타내는 바늘이 움직이면 이내 녹음이 잘 되고 있다는 것이다. 너무 재미 있었다. 나는 빌려 달라 했고, 정기는 선뜻 내주었다. 그러나 그 결말은 비극이었다. 그 녹음기는 내 호기심의 제물이 되고야 말았다. 대체 어떤 원리로 목소리가 기억되며, 그것을 다시 들을 수 있단 말인가? 녹음기는 한번 분해 된 후 원상복귀 되지 못했다. 정기 네 집의 국보 1호는 아닐지라도 그 집의 소중한 물건임에는 틀리없는 것일 텐데 말이다. 정기는 생명을 잃어버린 녹음기를 받고서 그러나 ‘충분히 각오한 일’이라는 듯이 괜찮다 했다. 미안함과 안도의 심정이 순간 교차했다. 정기에겐 형님들이 계셔서 틀림 없이 야단을 맞았을 것이다. 후회와 더불어 각오도 새롭게 했었다. 그러나 내 호기심은 결코 멈추지 않았다. 그 후로도 사촌형님(당시 이리여고에서 수학 가르치시던 분)의 카세트도 망가졌고, 내 물건에 대해서는 더 이상 기억도 할 수 없을 정도다. 그런 내 모습에 친지들은 한 목소리로 ‘서울 공대’ 가라 하시곤 했다. 그러나 내 진로는 중학교 때부터 바뀌기 시작했다. 분해의 천재―조립의 천치가 어찌 공대에 갈 수 있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