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이야기

미륵산의 포 소리

써니케이 2006. 5. 13. 17:57

우리 어렸을 때,

미륵산은 아주 멀리 있었거나, 혹은 아주 가까이 있었다.

멀리 있었다는 것은 도무지 거기에 가 본 일도 없었고,

갈 수 있는 방법도 몰랐기에 무슨 ‘피안의 섬’ 같은 존재였다는 말이다.

가까이 있었다는 말은 웬만한 날에는 학교에서도

손에 잡힐 듯 느껴졌다는 말이다.

아무래도 당시는 공해가 없었고, 잔먼지도 없었을 때니까 말이다.

‘미륵’이라는 이름이 주는 이미지가 그런 인상을 더해 주었다.


그 미륵산은 정상 부근에 바위들만 보이는 그런 곳이었다.

그런 곳으로부터 ‘텅~ 텅~’ 소리가 가끔씩 들리곤 했다.

사실 처음에는 그 소리의 정체를 몰랐다.

먼곳에서부터 들려 오는 포 소리는 현장에서의 파괴력과는 상관 없이

무슨 큰북 소리 비슷해서 제법 음악적이기까지 했던 것이다.

어른들 말씀에 의하면 미륵산에 있는 포 사격장에서 들리는 소리라 했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무슨 전쟁터에서 자란 사람처럼 느낄지도 모르겠다만

우리는 전후 세대라 하기에는 좀 거리가 있는 베이비붐 시대의 아이들이었다.


사실 미륵산은 익산의 명산이다.

통영이나 원주에 있는 미륵산도 유명하지만

익산의 미륵산은 백제 문화와 더불어 풍부한 이야기 거리를 가지고 있고,

호남평야의 그 너른 들이 거기서부터 시작하기에

그 격조는 비할 수 없다고 본다.


그 남쪽 자락에는 미륵사지가 정말 넓게 펼쳐져 있고,

동남쪽으로 조금 더 내려가면 왕궁탑이 있다.

이름만 거창하게 왕궁탑이 아니라 실제로 왕궁의 탑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 탑에 금강반야바라밀경라는 이름의 불경이 금지경(金紙經),

즉 금을 얇게 펼쳐서 종이처럼 만들어 글자를 새긴 불경의 형태로 들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호사는 왕궁의 탑이 아니면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저 미륵산의 호위를 받는다면 충분히 왕궁도 둘 만한 곳인 셈이다.


미륵산 정상까지 처음 올라갔던 것은 결혼 이후의 일이었다.

성가대 야유회로 갔었는데, 그것이 유일한 등산이었다.

그러니까 그 포 소리를 들은 지 20년도 훨씬 넘은 때였다.

등산을 하면서 보니, 미륵산에는 어렸을 때 멀리서 바라보던 바위들이 보이지 않았다.

포 사격으로 다 부서진 것이었을까?

그것이 아니고 그 바위들이, 무성한 나무 숲에 가려져 있었던 것이다.

미륵사지를 비롯한 백제의 문화 유산은 박정희 씨의 덕을 보지 못했지만,

미륵산만큼은 박정희 씨의 식목 정책이 효력을 나타낸 것이었다.


중턱에는 사철 맑을 물이 넘쳐 나는 약수터가 있다.

신광교회의 안경운 목사님이 계실 때에

새벽마다 그 약수터를 찾으셨다.

그 분을 따라서 늘 대여섯 명이 함께 다녔는데

어두컴컴한 새벽의 행군에는 나도 포함되어 있었다.

일단의 크리스천들이 새벽마다 미륵산에서 명상과  경건 훈련을 했던 것이다.


지난 2월에 내가 지도하고 있는 중국 유학생 9명과 함께

남원에 다녀오면서 굳이 미륵사지를 여정에 포함시켰다.

이제 미륵산은 서울에서도 그리 먼 산이 아니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들이 듣지 못했던 소리를 나는 들을 수 있었다.

그 ‘피안의 섬’에서 멀리 들려 오던

바로 그 포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