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장실의 추억- 학준이 이야기
한국의 화장실은 세계 최고다. 고속도로 화장실에 비데까지 놓여 있는 나라가 세상 어느 천지에 또 있단 말인가? 우리나라를 다녀가는 사람들에게 확인해 보면 한결같이 나의 생각에 공감을 한다. 일본의 화장실도 깨끗하다. 정말 깔끔하다. 그러나 너무 좁아서 점수를 잃는다. 미국의 화장실도 좋다. 특징적인 것은 표준화가 잘 되어 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걸 사용하는 사람들이 문제다. 공중화장실을 이용하는 사람들의 수준을 보면, 미국 사람들이 남들 안 보는 데서 무슨 짓을 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공중화장실에 들어가서 털썩 주저앉을 수는 없다. 한참을 정리한 다음에 이용해야 한다. 한국 사람들이 화장실을 이용하는 문화의 수준도 정말 많이 향상되었다. 그러나, 한 삼십년 쯤 전에는 판이했다. 좌변기는 말할 것도 없고, 수세식 화장실 자체가 드물었다. 말하자면 ‘수세식’이 아니라 ‘푸세식’이었다. 집에 잇대어 두는 것은 정말 견딜 수 없는 일이기 때문에 오죽하면 ‘처갓집과 변소는 멀수록 좋다’라는 말이 있을까? 문을 열고 들어가면 윗 공간과 아랫 공간으로 구획되어 있고, 그 사이에 자그마한 크기의 구멍이 나 있다. 그 외에는 아무런 시설물이 없다. 그리고 그 아랫 공간에는 다시 바깥으로 통하는 구멍이 또 있다. 이것을 화장실(化粧室)이라 부르는 것은 너무나 과분하다. 그것은 직접 언급하기 더러워서 에둘러 표현하는 일종의 완곡어법이다. 변소(便所)라 하기에도 너무나 불편한 점이 많다. 그냥 측간(厠間)(전라도식으로 ‘치깐’이 더 좋겠다만)이란 말도 있지만, 아니면 좀 저속하더라도 ‘똥깐’이 제격이다. 그 저속한 공간에는 많은 사연들이 함께 한다. 가끔씩은 윗공간과 아랫공간 사이의 구멍으로 몸이 빠지는 아이들 이야기가 들리기도 하며, 그러다가 생명을 잃는 경우도 있었다. 여름철에 한물이 지면 그 아랫공간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들이 물을 타고서 둥실둥실 떠 다니기도 했다. 또 그 아랫공간은 벌레들의 거주 공간이기도 했다. 냄새 문제는 이미 다 포기한 상태였기 때문에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워낙 전기를 아껴 쓰던 시절이었던지라 화장실에는 전깃불을 켜지 않거나 아니면 최소한의 조명만 유지하는 수준이었다. 그래서 화장실은 약간은 두려움의 공간이기도 했다. 각종 귀신들이 문패를 걸고 있기도 한다. 그 중에는 ‘달걀 귀신’, ‘처녀 귀신’ 등의 이름이 보인다. 그래서 동반자가 없이는 저녁에 화장실 가지 못하는 어린이들도 많았다. 아마 학준이도 그랬을 거라고 생각한다. 2학년 때의 일이었고, 그때 우리는 남성중학교가 새 건물을 지어서 이사 간 다음에 남겨진 오래 된 건물의 교실을 사용했다. 바닥은 나무 판자로 되어 있었고, 군데군데 구멍이 뽕뽕 뚫려 있었다. 화장실은 멀었고, 그 화장실에도 몇 가지 문패가 있었던 것이다. 수업 시간에 학준이는 어색한 표정과 자세를 짓다가 결국 냄새 때문에 들통이 나고야 말았다. 이종래 선생님은 저 중앙동 동사무소 옆에 살고 계셨던 학준이 엄마를 오라고 연락하셨고, 학준이는 교실 출입문과 구석 사이의 삼각 공간에 숨어서 뒷정리를 했다. 학준이를 괴롭혔던 이 치깐은 사실 알고 보면 너무나 인간적이고 자연적이다. 우선 일정 기간 식구들의 배설물이 모이면, 그것을 수거해다가 따로 모아 놓는다. 시골길을 가다 보면 그 모아 놓은 장소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거기서 또 시간을 보내면 이 배설물들은 최상급의 비료가 된다. 자연의 아름다운 순환의 질서 가운데, 하나의 마무리와 또 다른 새로운 시작이 연결되는 부분에 놓이는 것이다. 정말 인간적인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재래식 화장실에서 식구들은 서로의 상태를 너무나도 잘 알게 된다. 앞에서 변을 본 며느리가 변비에 시달리고 있는지, 어제 아이스케키를 많이 먹은 막내가 아침에 설사를 했는지 안 했는지, 아버지의 변 색깔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입사시험을 치르고 합격자 발표를 기다리고 있던 큰아들의 변에 피가 섞여 있는지 아닌지를(1984년에 일어난 실화다.) 재래식 화장실은 금새 리포트해 준다. 수세식에서는 죽어도 알 수 없는 일이다. 말하자면 지극히 사적인 공간인 화장실이 가족의 공동 영역이 되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