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이야기

병에 대한 기억들

써니케이 2006. 6. 13. 16:39
내가 문병(問病)이라는 것을 처음 해 보았을 때가 기억난다.

홍성우가 아파서 학교에 나오지 않은 날이 있었다.

4학년 때인지, 5학년 때인지 가물가물하다.

선생님(4학년 때라면 이종래 선생님, 5학년 때라면 김태학 선생님)은

친구가 아파서 학교에 나오지 못했으니,

병문안이라도 가는 것이 좋지 않겠느냐고 권유하셨다.

사실 그 무렵에는 웬만큼 아파서는 결석을 하지 않았다.


나는 선생님 말씀을 따르기로 했다.

성우와는 아주 절친했다고는 볼 수 없어도, 유치원 때부터 함께 생활을 했고,

집도 멀지 않은데다, 엄마들끼리도 서로 아는 처지였었다.

그냥 가기가 뭣해서 어머니의 추천을 받아 무언가 먹을 것을 싸 가지고 갔다.

성우 네 집은 아마 지금 ‘민지약국’이 있는 자리에 있었던 것 같다.

그 유명한 ‘홍치과’가 바로 성우 아버님이 운영하시던 곳이었다.

성우는 안타깝게도 정말 아파서 누워 있었다.

분위기는 좀 어색하기도 했다. 나는 어줍은 소리로 학교 얘기며,

문병을 오게 된 얘기며, 빨리 나으라는 얘기며

그런 말을 했던 것같다.


다음 날 학교에서 선생님이 나를 칭찬하는 말씀을 하셨다.

첫째는 친구의 병문안 간 일을 칭찬하셨고,

둘째는 선생님의 말씀을 잘 따른 일을 칭찬하신 것이다.

성우 어머님이 학교에 보고를 하신 것이었다.

나는 내가 한 일에 비해 너무 과분한 칭찬을 들어서 어찌할 바를 몰랐다.


***


어렸을 때 사실 나 역시 몸이 약했다.

그러나 초등학교 때엔 결석을 한두 차례 정도만 했던 것같다.

늦으막에 얻은 유일한 아들이어서 부모님들이 내 건강에 신경을 많이 쓰셨다.

나는 약을 무자비하게 많이 먹었다.

초등학교 때는 탄약(왜 이 말이 사전에 없는지? 총에 쓰는 彈藥만 있다.)이라고

새카만 한약 알갱이를 30개씩 삼켜야 했다.

오랫동안 그렇게 했다.

식은땀이 많았고, 그때문에 용하다는 의사도 많이 찾아보았다.

도장침이라는 것을 맞아본 일도 있다.

꼭 루즈 케이스 같은 것을 등에 찍으면 그 안에서 뾰족한 침들이 나와서

일정한 깊이만큼 살갗을 파고들었다.


중학교 때에는 3학년 무렵에 왼쪽 어깨에 생긴 골수염으로 고생을 했다.

박외과의 박신배 원장님은, 수술을 해야 하고, 자칫 신경을 건들면

곰배가 될 수도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다송리에 사는 어떤 노인네를 만나, 민간요법으로 깨끗이 나았다.

그 민간요법이라는 것은 빨간색 가루약을

한지에 말아 상처 깊숙히 밀어넣어서,

그 농소(膿巢)를 녹여내는 것이었는데,

내 생각에 그 빨간 가루약은 사실은 수은을 가공한 아말감의 일종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정말 위험한 일이었지만 섬세한 손길로써 잘 처리되었던 것이다.


고등학교 때는 2학년 2학기부터 3학년 내내 또 다른 병으로 고생을 했다.

물론 중학교 때부터 시작된 축농증은 내가 조교를 하던 80년대 초반까지도 나를 괴롭혔고,

고등학교 때의 주된 병은 바로 ‘폐결핵’이었다.

보건소에서 그러한 판정을 받았을 때,

나는 어이없게도 ‘나도 이제 우리 문학사에 이름을 올리고 있는 문학인의 반열에 드는구나!’

이런 생각을 했다.

말하자면 우리 근대의 문학가들 대부분이 바로 이 병으로 고통을 받고 죽어갔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긍지와는 별도로 나는 주사나 약병들과 씨름해야 했다.

그 씨름은 오래 계속 되었다.

이틀에 한번 꼴로 보건소에 가서 주사를 맞았고,

그때마다 온몸은 저릿저릿했다.

각혈은 하지 않았지만 심한 기침과 가래로 고통스러움을 느껴야 했다.

오죽 했으면 고3 때 옆에 앉았던 서재원이가

‘그렇게 공부 안 하면, 어떻게 대학을 가느냐?’고 염려를 했을까 말이다.

그러나 어떻게든 병도 나았고, 대학도 그냥그냥 가게 되었다.

다만 오랜 병치레 끝에 항생제에 내성이 생기는 바람에

같은 감기라 해도 남들보다 약의 강도가 세야만 했다.

결혼 후에도 그랬기 때문에 안사람이 ‘당신은 약을 취미로 먹느냐?’고 할 정도였다.


이제는 비교적 건강하다.

공기가 맑은 곳에서 근무하는 덕인지 호흡기 질환이 유행할 때도

비껴 가는 경우가 많다.

사실 노부모님들을 모시고 있는데,

따로 잘 해 드리는 것도 없지만,

내가 아프지 않는 것만으로도 자그만 효도는 되지 않겠나 싶다.

요사이는 50만 넘으면 남은 인생은 그냥 덤으로 사는 것이라 생각하라 한다.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지만,

확실히 내 눈을 두고 생각을 해 보면,

일단 10년 전부터 퇴화의 과정에 있는 것은 틀림없다.


***


그러고 보니, 동기들 중에는 의료인들이 참 많구나.

성우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홍치과’에서 인술을 펼치고 있다.

오강렬 장로는 익산에서 제일 유명한 내과의사이고,

조정구는 원광대 병원의 내과 교수다.

임두원이는 순천향대의 정신과 교수고,

김연희는 삼성서울병원의 재활의학과 교수로 이름을 떨치고 있다.

이순은 포항의 선린병원에 근무한다.

김용주는 인천에서, 이선구, 송병주는 서울에서 개업을 하고 있다.

황일택은 서울에서 한의원을 하고 있다.

박한규도 서울에서 한의사를 하다가 신학대학원을 나와서

지금은 미국에 있는데, 곧 목사님이 될 것이다.

박동주, 이흥렬, 오강렬, 모영하는 약국을 하고 있고,

박문조는 원대 한방병원에 근무한다. 황원형도 의료 관련 일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안다.

(사실은 집안 사정이 허락했으면 나도 한의대에 갈 뻔 했다.)

모르긴 해도 후배들 중에도 의료와 관련된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 정도의 맨파워라면 종합병원도 세울 수 있을 정도다.

(의사에게 시집 간 여자 동문들은 없는지?)

이렇게 훌륭한 동문들이 있어서 너무나 자랑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