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이야기

손에 붕대 감은 사연

써니케이 2006. 6. 13. 17:48

우리 때에는 중학교 입시라는 것이 있었고,

사실 그 덕분에 남성국민학교의 존립 근거가 있었다.

5,6학년 때에는 정말 교과서를 달달달달 외우느라 정신이 없었다.

책을 한 벌씩 더 사서는 주요 단어를 까맣게 칠해 놓고

그걸 제대로 읽어 내는 연습을 열심히 했던 기억이 지금도 새롭다.


전라북도에서는 전주북중이 제일 좋았지만,

대부분의 동기생들이 가까이에 있는 남성중학교로 진학했고,

여학생들은 대부분 이리여중을 지원했다.

남성학원에 관계되는 집 따님들은 남성여중으로 갔다.

남성중학교는 그래도 전라북도에서는 사립으로는 자타가 공인하는

최고의 명문이었다.

주변의 학교들의 최고 인재들이 남성중학교에 밀려들었다.

첫 졸업생들이 남성으로 진학하는 일은

남성국민학교로서는 아주 중차대한 일이었다.

그것은 남성국민학교의 차원만의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결국에는 남성 재단과 관계된 일이기도 했다.

졸업생들의 입학 시험은 새로 만든 학교가

명문 남성의 일원이 될 만한 자격을 시험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우리는 시험 당일에 손에 붕대를 감았다.

필기시험 외에 체력장 시험을 볼 때였다.

우리는 선생님께 지시를 받은 대로

손에 붕대를 감고, 시험에 임했다.

선생님 말씀은 붕대를 감으면 철봉에서 미끌어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붕대는 철봉 시험 때만 감은 것이 아니었다.

달리기나 넓이뛰기를 할 때도 감고 있었다.

그리고 오직 우리 남성국민학교 출신들만 감았다.

그러니 너무 쉽게 눈에 띄었고,

당연히 불공정에 대한 시비가 일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내의 모든 국민학교에서 남성국민학교를 견제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큰 말썽은 없이 남성중학교에 안착할 수 있었다.

평소에 열심히 공부를 했고,

선생님들이 잘 지도해 주신 덕이었을 것이다.

중학교에 입학한 이후에도 우리들이 그 실력을 유감 없이 발휘함으로써

남성중학교로의 진학에 아무런 하자가 없음을 과시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다음 해에 입학 시험을 볼 때는

그 붕대는 사라져 버린 것으로 알고 있다.


내가 1978년도에 그러니까 남성중학교를 졸업한 지 6년 만에

교생의 자격으로 다시 방문했을 때에,

이미 예전의 남성은 없었다. 소위 ‘뺑뺑이’의 운으로 들어온 학생들만 있었다.

나의 신경은 극도로 곤두세워졌다.

그때문에 그 해에 교생에게 매를 맞았다는 학생들의 불평이 제법 있었다 한다.

하지만 나를 지도하셨던 조재섭 선생님의 승인을 받은 적법한 일이었다.

‘뺑뺑이’의 시대가 된 이후에

교육에 대한 정부의 투자가 이루어지면서 공립학교들이 많이 좋아졌다.

사립학교는 학생들의 수업료를 받아서 학교에 재투자하기가 어려운 입장이 되었다.

사실 인건비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추첨과 무시험 배정은 결과적으로

남성국민학교의 존립의 근거를 잃게 만든 것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지방 소도시에서 사립 국민학교로 살아남기는 정말 어려웠을 것이다.

결국 설립 후 20년도 채우지 못한 채

남성의 작은 불빛 하나는 결국 사그라들고 만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