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학
선생님은 가끔씩 우리에게 새로운 아이디어로
우리를
자극하시곤 했다.
어느
날 국어 시간이었다.
선생님은
작문의 기법으로 묘사의 세밀함을 강조하셨다.
물론
당시에 우리가 기법(技法)이니, 묘사(描寫)니, 세밀(細密)에 대한
개념이
있을 턱이 없다.
오늘날
국어 선생의 입장에서 당시의 상황을 되새겨 보니,
그게
그렇구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선생님이
제안하신 방법은, 하나의 간략한 문장을 길게 표현해 보라는 것이었다.
단어의
수를 늘려서 충실히 표현하라는 제안이었다.
일단
내가 제일 먼저 손을 들었다.
손을
먼저 든 것은 원래 나의 전매 특허였다.
학교
친구들은 잘 몰랐겠지만
주일학교에서는
새로운 동요를 배우고 나서 늘 손을 먼저 들었다.
하얀색
전지 차트에 매직펜으로 가사를 적어놓고
노래를
가르쳐 주신 다음에는 늘 노래 부를 학생을 찾아 부르게 하였던 것이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제일 먼저 손을 들어서
연필
한 자루씩을 타곤 했다.
여러
차례 그런 일이 반복되자, 당연히 아이들로 하여금 노래 부르기 하기 캠페인은
당초
그 취지가 시들해져 버린 것이다.
도무지
경쟁이 안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선생님들이 새로운 정책을 만드셨는데,
그것은
“병선이는 다 외운 다음에 손을 들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나에게는 별 장애가 되지 못했다.
왜냐하면,
원래 천재였기 때문이다. (농담 한 마디)
김태학
선생님은 ‘오늘 날씨가 좋다’ 같은 간단한 문장을 제시하셨다.
선생님이
원하는 진정한 답안은 아마도 이랬을 것이다.
“지루했던
장마가 끝난 오늘은, 구름 한 점 없이 하늘이 파랗고, 서쪽에서 서늘한 바람이 불어 상쾌하기만 하다.”
그러나
그런 취지를 알 턱이 없었던 나는 대충 다음과 같은 답을 하고 말았다.
‘오늘
날씨가 좋다고 보기에는 자신이 없지만, 그렇다고 나쁜 것도 아니라고 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단지
말장난에 불과했던 것이다.
선생님의
진지한 제안을 넌센스 퀴즈로 변질시켜 버렸던 것이다.
선생님은
난감해 하셨다. 아이들도 웃었다.
그
웃음이 끝나갈 무렵에 정기가 다시 손을 들었다.
정기는
나의 문장에 몇 단어를 더 첨가하는 것으로 문장의 길이를 확 늘려 놓았다.
선생님은
이제 포기하신 표정이었다.
결과는
정기의 판정승이 되었으나, 말하자면 나의 아이디어를 차용했으니
누가
이기고 지고를 가릴 만한 상황은 아니었다고 본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둘 다 실격이 된다.
선생님
머릿속 캐비닛에 들어 있던 정답에서는 완전히 멀어졌기 때문이다.
아마
그때 선생님의 취지를 제대로 이해했더라면,
나의
문장에 대한 관심이 훨씬 더 일찍 시작되었을 텐데,
그러지
못했던 것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선생님은
어째서 당신의 취지를 끝내 관철시키려고 하시지 않았는지
그것이
궁금하다.
싹수가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고 판단하신 것은 아니었을까?
지금
생각해 보아도 문장력과 표현력을 기르는 데는 대단히 유익한 제안이셨는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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