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글, 글과 말

도가니의 진실

써니케이 2008. 3. 23. 19:00

어제 운동을 하고, 함께 했던 일행과 도가니탕집에 들렀다.

미리 깔아 놓는 찬 중에, 조개젓의 맛이 심상치 않았는데,

주인 아줌마 말씨도 친근감이 들었다.

일행에게 아마도 전라도 특히 북도 사람이라고 주장했는데,

음식점을 나올 때, 일행들이 확인해서 전하는 바에 의하면

아니나 다를까, 익산 사람이란다.

그래서 그냥 갈 수가 없어서, 난 창인동인데(남중동이기도 하다만)

어디냐고 물었다. 그랬더니 '황등'이란다. 돌 많이 나는...

아, 황딩이... 화강암이 유명한 곳이지...

거기 그 좋은 돌로 미륵탑이며, 왕궁탑이 만들어졌고,

청와대나 국회의사당의 벽들도 그걸로 치장되었다.

 

화강암이 문제가 아니고, 오늘의 관심사는 바로 도가니가 뭐냐는 것이다.

식사를 하는 동안 이에 대한 토론이 있었고,

나는 국어 선생으로서, 이런 생각을 말해 보았다.

도가니란 쇳물을 녹일 때 쓰는 용기다.

금은방에서 반지를 녹이는 용도로 쓰이는 작은 것부터,

시뻘건 쇳물을 녹이기 위해 용광로에서 사용하는 커다란 것까지,

그러한 금속성 물질을 가열하여 녹이는 그릇이 바로 도가니다.

이 말이 비유적으로 적용될 때, '광란의 도가니', '열정의 도가니'에서처럼

일정한 범위의 지역 안에서 열기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현상을 가리키기도 한다.

이 말은 중세국어에서는 '도관'이라 표기되었다.

<훈몽자회>(1527)에 ' 도관 감 도관 과' 라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오랜 옛날부터 쓰던 말로 보인다.

 

그러면 도가니탕의 도가니는 무슨 뜻일까?

사전을 찾아 보니, '무릎도가니'란 말을 줄여서 '도가니'라고도 하는데,

무릎도가니는 '소 무릎의 종지뼈와 거기에 붙은 고깃덩이'를 말한다.

종지뼈는 무릎 한 가운데에 있는 오목한 부분을 말하는데,

그 생김새가 작은 종지 모양이라서 그런 이름이 붙은 듯하다.

종지는 오목한 모양의 작은 그릇인데, 양념을 담아 놓는 용도로 사용된다.

그러니까, 그것도 금은방에서 쓰는 도가니 모양이라고 보아도 된다.

그래서 그걸 도가니라고 부른 건 아닐까 싶다.

 

일반적으로 신체어가 먼저 있고 나서,

그 신체어와 닮거나 기능이 비슷한 것에 신체어를 비유적으로 붙여서 사용한다.

예를 들면 '다리'라는 것은 원래 사람의 다리(脚)을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상부의 물건을 떠받치고 있는 길쭉한 물체라는 뜻으로 의미가 확장되었다고 볼 수 있다.

머리(頭)라는 것도 사물의 상부(上部)에 있는 것으로

그 사물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나타내는 의미로 쓰인다.

그런데, 이 경우에는 오히려 사물의 이름이 신체에 적용되었으니 거꾸로 된 셈이다.

아마도 무릎의 도가니 같은 것에 관심이 없다가

(당연히 이름을 별도로 붙여 놓지 않고 있다가)

그것을 음식의 한 종류로 발전시키면서

거기에 붙인 이름이 바로 '도가니'가 아닐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본다.

 

아무튼 일행은 도가니 수육을 맛있게 먹었다.

도가니 맛을 안다고 자부하는 일행 중 한 사람은

이거는 정말 품질이 좋은 도가니라고 확인해 주었다.

그러고 보니, 그 주인 여자의 고향인 황등에는 맛좋은 소고기로 이름을 떨치는

음식점이 있는 것 같다.

황등 시장통에 있는 '진미식당'의 육회 비빔밥은

오히려 비빔밥의 본고장인 전주의 미식가들이 즐긴다.

조개젓의 구수함은 인근의 '갱경이'(강경) 젓깔시장의 맛을 이어받았을 것으로 본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왜 황등의 고기가 좋았는지 말해 줄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