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이야기

"네 남편을 데려오라"

써니케이 2006. 6. 24. 10:04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학생들이 가장 꺼리는 말이 있습니다.

“엄마 좀 오시라 해라!”

학생이 무언가 잘못 된 일을 했을 때,

그 학생과 선생님의 관계로써 그 문제를 마무리하지 못하는 경우에,

선생님이 사용하는 최후의 카드가 그것입니다.

화장실에서 담배를 피다가 걸리거나, 불건전한 잡지를 가방에 넣어가지고 다니거나,

시험 시간에 커닝을 하다가 적발이 되는 경우에,

학생에게 야단을 치거나 벌을 주는 것으로 마무리가 되면 좋겠지만,

상황이 심각한 경우에 선생님들은 “부모를 모시고 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모시고 오라”라는 말은 어쩌면 위협용인지도 모릅니다.

진정 학부모를 소환할 의사가 있다면

선생님이 직접 전화로 학생의 부모에게 통지하면 되기 때문입니다.

어쨌거나 학생 본인은 “모시고 오라”라는 말을 듣게 되면

정말 전전긍긍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비록 학교에서는 선생님께 찍혔다고 하더라도

집에서는 그냥 착실히 학교에 다니는 것으로 알고 있고,

부모가 학교에서 선생님을 만나게 되면 그 동안 숨겨 왔던

모든 진실이 다 드러날까 봐 겁이 나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엄마를 모시고 오라”는 선생님의 말씀은

학생의 가장 취약한 곳을 건드리는 말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는 루트를 사마리아를 경유하는 길로 정하셨습니다.

그것은 일반적인 경로 찾기에서는 추천하지 않는 길입니다.

보통은 여리고 쪽으로 해서 요단강을 따라 올라가는 루트를 이용하곤 했습니다.

비록 최단거리로 갈 수 있는 길이었지만,

사마리아 길은 대다수의 유대인들이 결코 선호하는 길은 아니었습니다.

물론 사마리아 사람들도 유대인들이 자신들의 영역을 통과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그 루트가 사람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었던 것은

유대인들과 사마리아 인들의 감정 문제가 결부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서로 싫어했고, 외면했고, 무시했으며, 심지어 ‘개 취급’했습니다.

이날따라 예수님과 그 일행이 사용하는 내비게이션 장치가

약간의 착오를 일으킨 것은 아닐까요?

그러나 이 일행 중 한 사람이며, 이날의 사건을 기록한 요한은

“통과해야 하겠는지라”라고 표현합니다.

Now he had to go through Samaria.(NIV)

NIV 번역본은 그 길을 예수님이 직접 선택하셨고,

이번에는 그 길로 가야만 했다고 말합니다.

즉 ‘통과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피동적이든 능동적이든 그것은 이 일행의 의지에 의한 선택이었다는 것입니다.

피동적이라면, 유대 지방에서 예수님이 세례를 베풀고 제자로 삼은 사람의 수가 늘어나

바리새파 사람들이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는 4장1절의 기록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습니다.

성경의 기자는 2절에서 굳이 ‘세례는 예수께서 직접 베푸신 것이 아니고

그 제자들이 준 것‘이라고 주석을 달았습니다.

무언가 오해가 개입되기 시작했고, 그로 인해 갈등이 커져 가는 것을 느낄 수 있습니다.

말하자면 사마리아 길은 그러한 오해와 갈등으로부터 비껴가는 길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이 살지 않는 루트를 선택한 것은 일단 그들의 눈을 피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사마리아 길을 능동적으로 택하신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이번의 루트를 예수님께서 적극적으로 선택하셨고,

거기에는 사마리아에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하려는 의도가 있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의 본문을 통해서 우리는 이미 사마리아 여인과의 만남이

최종적으로 수가성의 보편적 구원으로 열매를 맺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수가성 사람들은 자신들의 판단에 의해 예수님을 메시아로써 받아들입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능동적으로 이 루트를 선택한 결과로 나타난 일입니다.


(새번역 성경에서 ‘그렇게 하려면, 사마리아를 거쳐서 가실 수밖에 없었다(4)’라고 번역한 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예수님 일행의 루트 선택에 대한 가능성을 부정하는 표현이기 때문입니다.)


사마리아 길의 한 고비에 예수님은 무척 피곤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수가성 외곽의 한 우물가에 주저앉아 쉬고 계십니다.

그러다가 마침 거기 물 길러 나온 여인과 긴 대화를 나누십니다.

일단 처음의 대화 주제는 ‘물’에 관한 것이었습니다.

‘물을 달라’

대체 사마리아 길을 능동적으로 적극적으로 선택한 사람의 태도는 아니었습니다.

구원의 복음을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에 이르기까지 전파하려는 사람의 방식 치고는 너무나도 어설픕니다.

타는 갈증 때문에 잠시 본업을 잊었던 것일까요?

하기는 마을 외곽 우물에 물 길러 나온 여인에게 말을 걸었다는 것 자체가

좀 어설픈 행동이긴 합니다. 좀 더 걷더라도 수가성 안으로 들어가야 했습니다.

그래도 그 마을 안에는 쓸만한 사마리아인들이 많이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제자들도 먹을거리를 찾아 성 안으로 들어갔습니다.

예수님만이 이 우물가에 앉아계시고, 수가성의 한 여인,

남들 몰래 물을 길러 나온 여인이 그 자리에 함께 하고 있는 것입니다.

몇 마디 말이 오고간 뒤에 이제는 수가성 여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 물 좀 주세요.”

예수님도 여인도 서로 물을 달라고 하는 묘한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두 사람의 대화는 평행선을 달리고야 말았습니다.

 

여인이 바라는 물과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물은 결코 같은 물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는 H2O라는 화학식으로 그 분자 구조를 표현할 수 있는 것이지만,

다른 하나는 화학식으로 설명할 길이 없는 것입니다.

하나는 우물에서 두레박이 있으면 얻을 수 있는 것이지만,

다른 하나는 오로지 예수님만이 주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는 약간의 수고나 금전의 지불을 통하여 구할 수 있는 것이지만,

다른 하나는 그냥 값없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서로 다른 개념으로 주고받는 대화가 오래 지속될 수 없었습니다.

역시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도저히 어울 수 없는 사람들인가 봅니다.

정작 물을 필요로 했던 두 사람이었건만

아직 상대방에게 물을 줄 생각도 못하고 있습니다.


결코 평탄하지 않은 대화의 끝에

예수님은 이제 새로운 제안을 합니다.

“남편을 데려오라.”

여인은 정말 화들짝 놀랐을 것입니다.

예수님에게는 ‘남편을 데려오라’ ‘데려오지 말라’ 말할 권한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그 여인의 가족도 손윗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물론 그 여인이 학생도 아니었고, 예수님이 선생님도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어조는 단호했습니다.

남편의 소환, 더 정확히는 남편의 동반 소환을 요청한 것이지만

그것은 그냥 지나가는 말로 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문제의 해결을 위한 첫걸음이었습니다.

‘남편의 문제’

그것의 해결이 없이 여인의 갈증은 해소될 수가 없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학교에서 몰래 담배를 피우는 아이에 대해

소지품 검사와 담배의 압수, 야단과 매질, 그리고 이어지는 정학 처분으로

일시적인 효과는 거둘 수 있겠지만,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할 수는 없습니다.

이런 때에 학부모의 소환은 그 말 자체부터 힘을 발휘할 것입니다.

사실 부모가 담배를 끊지 않고서 아이의 태도를 고치려 하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말도 안 됩니다.


여인은 예수님께 그 물을 요구하였습니다.

비록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과 뜻은 달랐지만 여인의 물에 대한 요구는 처절했습니다.

그러나 명확했습니다.

‘목마르지도 않고, 이곳까지 더 이상 물 길러 나오지 않게 해 주십시오.’

여인은 물 긷는 수고를 그치고자 합니다.

물 긷는 일은 육체적인 노동으로도 중노동임에 틀림없습니다.

물동이를 이고 오고가는 것도 아주 힘든 일입니다.

그러나 여인에게는 그보다 더 힘든 일이 숨겨져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아신 것입니다.

여인의 탄식에서 그 고달픔의 흔적을 발견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여인의 탄식을 그치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여인의 갈증을 생명의 물로써 해결해 주시고자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봉사활동 하러 사마리아로 가신 것이 아닙니다.

상수도를 깔아주어, 언제든 수도꼭지만 틀면 시원한 물이 콸콸 쏟아져 나오는

그런 시스템을 만들어 주러 가신 것이 아닙니다.

그분은 영혼에 관심을 가지고 가셨습니다.

여인의 영혼은 불행히도 상처투성이였습니다.

예수님이 유대에서 사마리아까지 산길을 힘들게 걸어왔던 것처럼

여인은 험로를 고달프게 걸어왔습니다.

남들은 여인을 비웃었고, 그 비웃음 가운데는 질시도 있었습니다.

여인은 정말 힘겨운 삶을 살아왔지만

더더욱 힘든 것은 주변의 인물들의 바로 그러한 비웃음과 질시였습니다.

여인은 외톨이였고, 외톨이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여인은 한적한 시간, 남들의 이목을 피할 수 있는 시간에

물을 길러 왔습니다.

성경의 기자는 분명하게 그 시각을 기록합니다.

‘정오’ 낮 열두 시.

한낮입니다.

뜨거운 햇볕이 유감없이 내리쪼일 때입니다.

그 더위에 사람들의 주의력이 다소간 산만해지면서

약간의 오수에 몸을 맡길 때입니다.

여인은 그 틈에 물을 길러 왔습니다.

사람 사이에 살다가, 사람들의 시선에 밀리면

그 사람들로부터 모습을 감추어 버리고 싶은 것이 보통 사람들의 심정입니다.

어떤 사람은 그런 때, 정말 깨끗이 잠적해 버리고 맙니다.

강물에 몸을 던져 버리기도 하고,

손목을 면도칼로 그어버리기도 합니다.

여인에게 왜 이런 심정이 없었겠습니까?

물을 길러 올 수도, 긷지 않을 수도 없는 이 운명은

정말 천형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만난 유대인 젊은이는 정말 알듯 모를 듯한 얘기를 하다가

졸지에 남편을 데려오라고 하는 것입니다.

여인은 화들짝 놀랐고, 아니 정말 어이가 없었습니다. 당황스럽기까지 했습니다.

‘남편이 없소.’

여인의 반응은 문제 해결을 위한 예수님의 제안을 거부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부모를 데려오라는 선생님의 명령에

‘부모님이 해외여행 중이신데요.’

아니 그것보다는,

‘저는 고아인데요.’

이렇게 피해 가고자 하는 심정은 누구에게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생명의 물을 주시고자 하시는 예수님의 열정을 여인은 피할 길이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 때문에 바로 이 사마리아 길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여인은 부지불식간에 진실을 고백하고 말았습니다.

“너에게는 남편이 다섯이나 있었고, 지금 같이 살고 있는 남자도 네 남편이 아니니, 제대로 말하였다.”

예수님은 여인의 과거를 적나라하게 까발립니다.

여인에게 있어서 남편의 문제는 ‘무거운 짐’의 수고였습니다.

영혼을 짓누르고 있던 그 무거운 짐의 정체가 확인되는 순간입니다.

여인은 예수님 앞에서 이제 그 짐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그것이 여인의 영혼의 상처를 만들어 낸 원인이었습니다.

여인은 짐을 내려놓습니다.

“선생님, 내가 보니, 선생님은 예언자이십니다.”

여인이 예언자라고 한 것은 객관적 평가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런 평가를 들으려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신자의 고백을 즐기는 분입니다.

여인은 놀라움과 두려움 가운데서 예수님을 ‘예언자시라’고 고백한 것입니다.

아무리 예언자 앞이라고 하여도, 그가 자신의 약점을 노출하여 드러낸다면

예언자라고 고백하는 일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여인의 고백과 더불어 이제 예수님의 사마리아 미션은 일사천리로 진행됩니다.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돌아갑니다.

이제는 자신의 불행한 과거를 스스로 노출합니다.

“내가 한 일을 모두 알아맞히신 분이 계십니다.

와서 보십시오. 그분이 그리스도가 아닐까요?”

여인은 동네 사람을 그리스도 앞으로 초청합니다.

그 근거는 바로 자신의 과거사였습니다.

이제 스스럼없이 그것을 노출합니다.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서는 거리낄 것이 없다는 태도였습니다.

여인이 과거사를 털어 놓음으로써 메시아에 대한 그녀의 증언은 큰 효력을 얻게 됩니다.

“남편을 데려오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이 내러티브를 파국으로 치닫게 만드는 대사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문제의 노출이었고, 치유의 시작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개인과 집단의 구원으로 열매를 맺습니다.

해피엔딩이 될 것이지요.


예수님에게 생명의 물 주시기를 간절히 요구하는 우리에게

예수님은 같은 명령을 하고 계십니다.

“네 남편을 데려오라!”

우리에게는 예외 없이 ‘남편’이 있습니다.

저에게도 있고, 여러분에게도 있습니다.

이 ‘남편’은 차마 드러낼 수 없는 ‘남편’입니다. 감추고 싶은 ‘남편’입니다.

그 남편과의 역사는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다섯 번을 거쳤고, 이제 여섯 번째의 실패를 경험하고 있는 ‘남편’입니다.

결코 성공할 수 없는 혼인관계인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영혼에 끊임없이 상처를 내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남편’ 때문에 남몰래 눈물을 흘려야 했습니다.

사람들 사이에 살면서, 교회에 꾸준히 출석하면서

그것이 노출되지 않기만을 바라고 살아왔습니다.

조마조마했습니다.

 

당신에게는 어떤 남편이 있습니까?

남들이 모르기를 바라는 그 어떤 아픔의 비밀이 있습니까?

아내 외에 따로 만나는 여자가 있습니까?

남편 몰래 사귀는 남자가 있습니까?

세무서에 제출하는 장부 말고, 비밀금고에 들어 있는 장부가 있습니까?

주변의 사람들에 대하여 겉으로는 웃음으로 대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칼날을 던진 적이 없습니까?

예수님과의 만남보다 더 고대하고 있는 만남이 있지 않습니까?

정말, 주님을 진정한 남편으로 여기지 않고,

다른 어떤 것과의 헤어짐을 더 안타깝게 여기지나 않습니까?


여인은 물 길러 왔다가 결국 그리스도를 만났습니다.

정작 필요한 것은 육신의 물이 아니라 영혼의 물, 생명의 물임을 깨달았습니다.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로 들어가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증언합니다.

여인의 갈증은 채워졌습니다.

영원한 생명의 물로 자신의 영혼을 적셨습니다.

예수님도 한 영혼을 구원한 일에 많이 흥분하셨습니다.

배고픔도, 목마름도 잊을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나에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흐뭇함을 표현한 대목은 드뭅니다.

그 흐뭇함은 “남편을 데려오라”는 요구에 모든 것을 내어놓은 이 여인에게서 비롯된 것입니다.


이 시간, 나에게 예수님께서 무엇을 데려오라 하실 것인지를 깊이 묵상해 봅시다.

그리고 그 ‘남편’의 수고와 짐을 더 이상 지고 가지 마시고,

예수님 앞에 내려놓읍시다.

그것이 여러분이 생명의 물을 얻고,

여러분의 이웃에게 구원의 기회를 제공하며,

또한 예수님께 영혼의 양식과 그 흐뭇함을 드리는 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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