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니까 나의 외갓집이란 말이다.
아버지 쪽의 삼촌은 정작 한 사람도 이남에 안 계셨지만 어머니 쪽의 삼촌은 많기도 하다.
우선 한때 이웃집에서 살기도 했던 큰이모가 계시고, 방죽밑, 방죽안 이모들이 계신다.
그 다음이 정읍군 옹동면 작소 본댁의 귀병이 외삼촌이시고, 그리고는 우리 어머니, 둘째 준병이 외삼촌, 동두천 이모, 여속리 이모, 익준이 삼촌과 한때 '대구이모'라고 불렀던 막내 이모가 계시다.
모두 10형제간이다. 이 중에 생존하신 분은 우리 어머니 이후 분들이시다.
아버지는 친가 쪽 형제자매가 없는 셈이어서 처가쪽 형제가 많은 것을 좋아하셨던 것 같다.
또 외갓집의 삼촌과 이모는 모두 다 아버지를 존경하고 좋아하셨다.
그 근거를 대자면, 형제간이 그렇게 많다 보면 서로 편이 갈리기도 하는데,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형제 중에 아무도 걸리는 분이 없으셨다.
그래서 외갓집 식구들이 다 우리 집과 이렇게 저렇게 인연을 맺으셨던 것이다.
막내 이모는 편물을 배우는 동안 우리 집에 기거했고, 또 형부를 그렇게도 좋아하셨다.
익준이 삼촌도 대학 때 한동안 우리 집에서 학교에 다니셨다 한다.
준병이 삼촌은 전구 공장 일로 오고 가면서 늘 우리 집에서 주무시곤 했다.
외갓집은 정읍이고, 우리 집은 익산이었기에 서울로 가는 혹은 서울에서 내려오는 친척들이 우리 집에 들르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뿐만 아니라, 큰외삼촌의 아들딸들도 우리 집에서 학교에 다녔다.
그 댁에도 모두 9명이나 되는 자녀가 있었다.
지금 용인에 사는 성자 누나도 우리 집에서 여고를 다녔고, 그 다음의 금자 누나(지금은 성가수녀원의 수녀님이다.)도 그랬고, 사촌 동생인 순오도 우리 집에서 고등학교를 다녔다.
각각 3년씩이니까, 오랜 기간을 우리 집에는 친척들이 함께 기거한 것이다.
그 외에도 원평에 사는 금냄이 누나도 편물 배우면서 우리 집에 계셨고, 여속리 이모 딸도 우리 집에서 간호보조원 공부를 했다.
아무리 친척이라고 해도, 바깥 사람들이 함께 거하는 것은 그리 쉬운 문제가 아니었다.
나는 가끔씩 사촌 누나들과 신경전을 펼치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무런 불평도 없으셨고, 그러한 일들을 당연한 일, 나아가서는 기쁜 일로 여기신 것 같았다.
이렇게 써 놓고 보니까, 우리 집이 마치 무슨 대갓집 같은 인상을 받으리라 본다.
그러나 놀랍게도 오랜 기간 동안 우리는 단칸방에서 여러 식구가 함께 기거했었다.
금자 누나나, 순오가 학교를 다닐 때 쯤에야 방이 두어 칸 있는 집에 살았다.
따라서 정말 힘든 일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하긴 그 시절에는 그런 일이 찾아보기 그리 어렵지 않게 있었겠지만,
아버지의 유난한 처갓집 사랑에 처가의 식구들이 늘 감동을 했다고 본다.
북한 땅에 형제 자매와 자식을 남겨 두고 오신 그 허전함을 어쩌면 처가 식구들에 대한 사랑으로 보상하셨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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