음악은 아름다운가☆

라이프치히에 살고 있는 'B'를 찾아서

써니케이 2009. 2. 18. 11:15

라이프치히에 살고 있는 'B'를 찾아서

 

2년 전에 독일에 간 일이 있었습니다. 업무 상 출장이었는데, 베를린에서 주말을 맞이하게 되어 덕분에 독일 음악과 함께 객고를 달래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먼저 떠오른 것이 베를린 필하모닉의 연주회였습니다. 이제는 전설이 되어 버린 카라얀도 가버렸고, 그 후계자였던 아바도도 없지만 세계 최고의 오케스트라를 그들의 음악 공간에서 접한다는 것이 대단히 흐뭇한 일이 될 수 있을 것이었습니다.

호텔의 로비에 비치된 안내 리플릿의 연주 일정을 보니, 연말이라 더욱 그랬겠지만, 공연 일정이 줄줄이 이어지고 있었습니다. 심지어는 리허설 현장까지도 표를 팔아 관객을 모으고 있었습니다. 인터넷에 접속을 하여 확인을 해 보니 실망의 한숨이 나왔습니다. 이미 모든 연주회가 만석이었습니다. Sold Out!

대안을 찾아야 했습니다. 연주회장 앞에서 서성이다가 암표상의 신세라도 질까 싶었지만 그런 제도가 있는지도 확실하지 않았습니다. 정작 내가 독일에서 접하고 싶었던 것은 베를린 필(Berlin Phil)이 아니고 또 다른 'B'였습니다. 그 또 다른 B가 자신을 찾아오라고 나를 부른 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였으나, 내가 정말 존경하고, 사랑하는 그 B를 이렇게 출장길에 짬을 내서 갈 수는 없다는 생각에 주저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B는 베를린이 아니라 거기서부터 기차로 세 시간을 가야 하는 라이프치히에 살고 있었습니다. 라이프치히, 정말 내 평생에는 갈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곳이었습니다만 베를린 장벽이 몇 무더기의 돌더미로 남아 버린 오늘날에는 그냥 기차만 타면 닿을 수 있는 곳이 되었습니다.

라이프치히에 살고 있는 B는 J.S. Bach입니다. 베토벤도, 브람스도 자랑스러운 독일의 B 이니셜 계열에 속합니다만 그 첫 자리에는 바흐가 있습니다. 그가 사는 27년 동안 라이프치히는 그에게 그리 따뜻하지 못했습니다만, 오늘날 라이프치히는 ‘견본시’로서가 아니라 바흐의 도시로서 더 유명합니다.

 

토요일 오후의 라이프치히 역사는 아주 붐볐습니다. 기차 여행객들도 있었지만 역사에 딸린 쇼핑몰에 몰린 인파는 대단했습니다. 바흐의 공간은 마침 역에서 15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습니다. 그가 커피를 즐기던 카페나 숙소도 있었겠지만 어디까지나 그의 공간은 바로 성토마스교회입니다. 38세에 부임해서 65세에 세상을 뜨기 까지 그는 그 교회의 합창장(칸토르)으로 봉직했습니다. 엄청난 분량의 예배 음악을 만들었으며,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를 지휘했고, 스스로 오르간 연주를 하기도 했습니다.

1750년 그가 뇌일혈의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난 이후, 그는 토마스교회는 물론이고 라이프치히에서도 잊힌 인물이 되고 말았습니다. 사람만 잊은 것이 아니고 안타깝게도 그의 음악까지도 잊어버렸습니다. 그러다가 몇 세대가 지난 후에 토마스교회의 합창장으로 부임한 멘델스존에 의해 부활합니다. ‘마태 수난곡’을 세상에 알리면서 바흐 부흥 운동이 시작된 것입니다. 그 캠페인의 끝에 바흐는 ‘음악의 아버지’라는 칭송을 듣습니다.

토마스교회도 참회를 했습니다. 바흐의 묘지는 교회당 안으로 옮겨졌고, 교회 마당에는 오로지 바흐의 입상이 세워져 있을 뿐입니다. 말하자면 바흐는 ‘성인(聖人)’의 반열에 오른 것입니다. 오늘날 이 거대한 루터교 교회는 바흐가 아니라면 결코 그 넓은 회중석을 채울 수가 없을 것입니다.

성탄절이 가까운 그 토요일 오후에 나 역시 그 회중의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관광객들은 몇 푼의 입장료를 지불해야 했습니다.) 도무지 그 거친 독일어 설교를 알아들을 길은 없었으나, 예배와 그 예배를 움직여 나가는 음악의 방향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2층 성가대석은 까마득해 보였지만 특별한 음향장치를 사용하지도 않았는데 소년소녀 합창단의 음향은 너무나 또렷했습니다.

오후 예배가 끝나고, 나는 저녁까지 기다리기로 했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그 교회당에서 라이프치히 게반트하우스 연주단의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연주회가 열리기 때문입니다. 내친 김에 최고급석으로 표를 사서 입장하고 보니, 본당 앞쪽 제단 근처에 자리가 있었습니다. 중요한 예전 때에 성직자들이 자리하는 공간이었습니다. 따라서 합창단과 오케스트라와 오르간을 보려면 몸을 옆으로 돌려서 위를 바라보아야만 했습니다. 그런 자리가 어떻게 최고급석이었느냐구요? 대답은 간단합니다. 그 이하 등급의 좌석은 2층 성가대석을 등지고 앉아야 하는 일반 회중석이었기 때문입니다. 제일 하급의 좌석은 2층 성가대석 난간 아래쪽 회중석이었습니다.

피터 슈라이어가 지휘자였습니다. 그는 이제 더 이상 에반겔리스트(복음사가)는 아닌 모양이었습니다. 그는 원래 오라토리오에서 예수님 수난의 장면을 서술한 마태나 요한의 목소리를 섬세하게 정확하게 역동적으로 선포해 주던 복음사가 역할의 최고봉이라 칭찬을 들었던 테너 성악가였습니다. 음반으로만 만나던 그 사람이었습니다.

드디어 연주가 시작됩니다. 크리스마스 오라토리오 서곡에서 트럼펫과 팀파니가 ‘복음의 기쁜 소식’을 빠른 템포로 펼쳐갑니다. 그리고는 한 시간 여 동안 성토마스교회당은 남성과 여성의 높고 낮은 음성들과 현악기며 관악기며 타악기의 다양한 소리들과 오르간의 꾸준한 울림으로 가득하게 됩니다.

 

나는 밤이 이슥해서야 베를린으로 돌아가는 기차를 탔습니다. 라이프치히는 더 이상 이방의 도시가 아니었습니다. 떠나기 싫었습니다. 돌아오는 내내 성토마스교회 기념품 가게에서 산 바흐 코인을 만지작거리면서 마음속으로 B에게 꼭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했습니다.

 

© 김병선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