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여 년 전에 업무관계로 텍사스 달라스에 갔던 일이 있었습니다. 사는 곳을 묻는 교민에게, 약간은 자랑스러운 어투로 ‘분당’이라고 대답했습니다. 그 교민은 ‘아, 그 천당(天堂) 밑에 분당이요?’라고 하면서 사뭇 놀란 표정을 지었습니다. 국내에서는 미처 듣지 못했던 얘기라서 잠깐은 당혹했지만, 나는 ‘뭘, 그 정도를 가지고…’라고 일부러 심드렁하게 받았었습니다.
그 뒤로 10여 년이 흘렀습니다. 바로 코밑에 판교라는 더 신식 도시가 세워지고 있고, 비록 아파트는 낡아가지만, 삶의 환경, 문화의 공간으로서의 분당은 이제 그 원숙미가 최고조에 달하고 있습니다. 그 10여 년 사이에 분당의 가녀린 가로수들은 매년 전지작업을 해주어야 할 정도로 풍성해졌고, 공원과 산책로는 한결 말끔하면서 자연친화적인 모습을 갖추었습니다. 그리고, 문화공간으로서 성남아트센터가 확실하게 자리잡았습니다.
어제 저녁에 그 센터에 다녀왔습니다. 수요일(6월3일) 아침에 받은 문자메시지 때문입니다. 평소에는 성남시립합창단 공연 안내 메시지는 그냥 넘겨버리던 내 눈에 그 다음 몇 글자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브람스’
브람스라….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다음 몇 글자였습니다.
‘독일 레퀴엠’
사실은 어제가 종강하는 날이라, 평소 같으면 저녁때 학생들과 식사라도 했을 텐데, 어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습니다. 부랴부랴 퇴근을 하고 집사람과 함께 아트센터로 달려갔습니다. 뜻밖에도 입장권 현장 판매는 거의 마감 직전이었습니다. 2층 날개석 뒤쪽으로 겨우 자리를 잡았습니다.
사실 공연에 대해 자세한 정보가 없이 그냥 갔기 때문에, 가는 내내 ‘독일 레퀴엠을 피아노 반주로 할 수 있겠나? 간단한 실내악단이라도 불렀나?’ 이런 염려를 했습니다. 그런데 기우였습니다. 팜플렛을 보니 성남시립교향악단이 협연을 하게 되어 있었고, 부천의 모 합창단이 협력하는 공연이었습니다. 교향악단은 풀 편성이었고, 합창단은 거의 100명이 되었습니다. 당연히 콘서트홀의 무대가 연주자들로 가득 찼습니다.
사실 어제 문자메시지를 받은 이후로, 내 머릿속에서는 독일 레퀴엠이 연주되고 있었습니다. 특히 제2악장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의 멜로디가 그리고 모티브의 팀파니 리듬 ‘단단단다-안’이 분명하게 기억되었습니다.
실제 연주로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은 처음 듣게 된 것입니다. 한 시간 가까이 합창단과 오케스트라는 브람스의 열정과 감격과 위로와 소망의 정신을 잘 표현해 냈습니다. 지휘자 박창훈 교수는 교과서적인 지휘를 해서 멋진 지휘 폼을 기대하던 1층 객석의 관객들이 조금은 심심했겠지만, 합창에는 한 치의 빈틈이 없었습니다. 비록 독일어 연주이긴 했어도 합창단은 곡을 잘 소화해 냈다고 봅니다. 다만 상대적으로 오케스트라 파트는 합창과 맞서 싸우기가 조금은 벅찬 느낌이었습니다. (실제로 제 1악장은 바이올린 파트는 연주에 참여하지 않았고, 트럼펫과 피콜로는 한 개의 악장만 연주했을 뿐, 내내 편안히 앉아 있었습니다.)
연주가 끝났을 땐, 정말 기립박수를 보내고 싶었습니다. 한 시간 내내 열정적으로 노래를 부른 합창단은 마지막 악장까지도 음정과 음색을 잘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앙코르를 요구하는 관객이 너무나 이기적이다 싶었습니다. 대곡을 감상했으면 그걸로 끝나야 합니다. 소품들로만 채워지는 스테이지에서는 몇 곡이라도 계속 연주할 수 있겠지만, 대곡은 그걸로 음악회의 종지부를 찍어야 합니다. 어제는 가장 감미로운 제 4악장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를 한번 더 연주해 주었습니다.
아쉬웠던 점은 소프라노 독창자의 선정이었습니다. 남성 독창자처럼 독일 쪽에서 공부한 사람이었으면 더 좋았겠다 싶었습니다. 독일어 딕션이 그다지 선명하지 못했습니다.
세계적으로 한 도시의 시립합창단이 브람스의 독일 레퀴엠을 완전한 버전으로 연주하는 경우가 얼마나 있을까요? 2층 날개석에 앉은 관객까지도 감동의 소리를 전달해 주는 연주홀을 가진 도시가 몇 개나 될까요?
단돈 1만원에 그것도 일체의 할인을 적용 받지 않은 채로, 성년 남녀가 그렇게도 멋지고 감동스러운 연주회에 참석할 수 있는 지역이 얼마나 될까요? 연주회를 마치고, 2천원의 주차비를 내고, 트래픽에 짜증을 내지 않고 집으로 돌아올 수 있는 도시가 별로 많지는 않겠지요.
이것이 내가 분당을 자랑하는 이유입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독일 레퀴엠’에 대해서 말씀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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