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이야기

자원봉사자 인숙이

써니케이 2006. 5. 4. 13:53

3학년 때 같다.

단층 짜리 교사에서, 축축한 시멘트 바닥에서 공부할 때의 일이다.

(물론 바닥에 앉은 것은 아니다.)

누군가 무척 선생님께 거슬리는 친구가 있었다.

당연히 벌을 받아야 했다.

자기 책걸상을 들고 교실 뒤편에 앉는 일이었다.

어찌 보면 지극히 간단한, 학생 편에서 환영할 만한 일이었다고도 볼 수 있다.

친구는 묵묵히 선생님 말씀을 따랐다.


막상 별 반발이 없자,

선생님께서는 한편으로는 측은한 마음이 드셨나 보다.

볼룬티어(volunteer)를 찾으셨다.

짝꿍해 줄 자원자를 원하신 것이다.

누구도 손을 들지 않았다.


그때, 교실 뒤편에 혼자 앉는 일이 어떤 의미였으며,

그것이 동료들에게 미치는 영향이 무엇이었는지는 잘 기억도 나지 않고,

지금도 명확하게 이해되지는 않았다.


일단 무엇보다 당사자가 약간은 침울해 했다는 것,

그리고 선뜻 짝꿍이 되어 주겠다고 나선 사람이 없었다는 것으로 보아

그리 신나는 일은 아니었던 것이다.


약간의 침묵의 시간이 지난 후에,

두어 차례의 선생님의 채근을 받은 후

나는 내 어깨가 간질간질함을 느꼈다.

그러나 뜻밖의 인물이 손을 들었다.

“제가 갈께요.”

여자 아이 목소리였다.

다들 의아한 모습으로 소리 나는 쪽을 주목했다.

인숙이였다.

“그렇게 하렴.”

선생님의 말씀이 떨어지자 인숙이는 자기 책걸상을 들고

교실 뒤편의 친구 옆자리로 갔다.

그리고 그 날 하교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

 

‘죄와 벌’의 공의를 세우는 것의 당연함보다는

사랑과 희생이 더욱 값지다는 것을 일깨워주었던

이종래 선생님의 의도는 성공하셨다.

인숙이는 사실 내 소꿉동무였다.

우리가 그 집에 세 살고 있었던 것이다.

철물점을 하시는 인숙이 아버님(박병석 장로님)은

시장에서만 아니라 이리 인근 지역에까지 훌륭한 인품으로 칭송을 받던 분이셨다.

베풀 줄 아는 넉넉함의 인심이

인숙이에게까지 유전되었음이 분명했다.


그 뒤로 인숙이에 대한 존경의 마음이 계속되었다.

스스로 용기를 내지 못했음에 대한 부끄러움도 잠시 있었다.

인숙이는 목사가 되어 지금 경기도 화성에서 목회를 하고 있단다.

어렸을 때의 희생과 봉사정신으로 아름다운 목회를 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