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이야기

‘매는 먼저 맞는 게 낫다’

써니케이 2006. 5. 5. 22:49

오늘 자 신문을 보니 <사이언스>지 사람이 시간에 따라 느끼는 고통의 강도를 다룬 논문을 실었다고 한다. 미국에서 32명의 자원자를 대상으로 실험한 결과 예고된 충격을 기다리는 시간이 그 충격만큼이나 고통스럽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아냈고, 실험의 결과로도 기다리는 사람의 뇌에서 충격과 동일한 반응을 관찰했다고 한다.


이 기사를 읽으며 하여튼 미국 사람들은 뭐든지 실험을 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미 우리에게는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는 속담이 있지 않은가?

이 말이 그 말인 것을 그렇게 어렵게 알아냈단 말인가?

한심한 친구들...... 쯧쯧......


나는 일찌기 중1 때, 이 속담의 의미를 진정으로 알아낸 바 있다.

한 마디로 ‘시간의 형벌’이라는 것을 체험한 것이다.


중간고사가 끝난 어느 토요일 종례 시간이었다.

1학년 5반의 우리 모두는 시험도 이미 다 끝났고,

숙제도 없고 해서

토요일 오후를 어떻게 즐길 것인가에 들떠 있었다.


담임 선생님은 그러나,

그날 오후를 피비린내 나는 오후로 바꾸어 놓으셨다.

종례시간부터 시작된 매타작은 네 시쯤이 되어서야 끝났다.

모두 맞았다.

중간고사 성적에 대한 보응이었다.

매질이 시작되고, 그것이 매타작으로 발전하면서

우리 모두의 관심은 ‘내가 몇 대 맞게 되는가?’에 모아졌다.

일단 자신의 성적이 아직 공개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성적도 궁금했고 그에 대한 형량도 궁금했다.

그러나 담임 선생님의 날카로운 칼날을 비켜가는 친구가 하나도 없었다.

장난이 아니었다. 비극이었다.

담임 선생님은 진정으로 화가 나 있으셨고,

우리는 임박한 진노의 날에 송두리째 벌거벗겨지고 있었다.

어쩌면 우리 반의 성적이 신통치 않았을 수도 있었다.


따지고 보면 맞아도 싸다.

우리는 소위 특수반(4반)에 들지 못했던 무녀리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런 자학의 심정도 들었다.

도시락 없는 점심 시간을 넘겨 가면서

우리는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키가 큰 편이었던 나는 뒤에서 서너 번째 쯤이었다.

이미 형벌을 받은 친구들은 종아리를 이렇게 저렇게 문지르면서

육체의 고통을 이겨 내려 애쓰고 있는 동안,

아직도 많은 시간을 기다려야 하는 친구들은

심장의 벌렁임에 허기짐조차 사치로 생각하게 되었다.


드디어 내 앞에, 앞에 친구 차례가 되었다.

이럴 수가?

그 친구는 매타작에서 비켜 갔다.

선생님은 그의 성적이 만족치 못하다고 호통을 치셨으나

입학성적에서 대단한 진보를 보였으며,

그의 지능지수에 비해 월등한 성적을 냈다는 것이다.


남은 친구들에게는 한 줄기 희망의 빛이 보인 것이다.

그러면 나는?

결국 나도 선생님 앞으로 불려갔다.

그 자리에서 나는 내가 우리 반에서 톱을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 내 차례가 되도록 아무도 그런 평을 들은 친구는 없었던 것이다.

그러면 이제 칭찬의 순서만 남았겠지? 라고 안도하려는 순간,

선생님의 질책이 내 머리에 꽂혔다.

‘너는 전교 1등 한 J보다 머리가 좋다. 머리 값도 못 하냐?’

다음 번에는 더욱 잘 할 것을 약속하는 것으로

내 육신의 형벌은 면제 받았다.

그러나 나는 그에 상응하는 충분한 정신적 형벌을 이미 받았다.

우리 모두는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결코 가볍지 못했다.


그러한 매타작이 기말고사나 2학기에도 계속되었는지는 잘 모른다.

2학기에 나는 한 반 앞으로 옮겨 버렸던 것이다.

같은 반이었던 친구들도 한둘 밖에 기억되지 않는다.

(이 친구들이 반창회를 하고 있다고 작년에 연락해 왔다. 세상에)


사람에게 시간은 확실히 형벌이 될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은 또 다시 축복이 되기도 한다.

‘천년을 하루 같이’란 말이 바로 그것을 표현한 것이다.

'추억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동창회장 원요는  (0) 2006.05.06
운동장은 넓고 할일은 많다  (0) 2006.05.05
정기 네 녹음기, 결국 망가지다  (0) 2006.05.05
영남이네 집에서 보던 플랑크톤  (0) 2006.05.05
열정적 실험 맨  (0) 2006.05.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