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이야기

신입반 선생님과 그의 제자

써니케이 2006. 6. 2. 13:24

우리 남성 동창들은 최소 6년부터 최대 12년 혹은 그 이상까지,

(유치원을 함께 다닌 친구도 있고, 대학과 대학원까지 함께 다닌 친구들이 있단다.)

정말 지근거리에서 함께 지냈기 때문에

부모님들 입장에서는 우리 친구들이 누군지를 다 아셨고,

또 누구 집 자식인지도 훤히 아셨다.

나아가서는 부모님들끼리도 대체로 잘 통하셨다.


우리 부모님도 우리 친구들은 많이 아시는 편이고,

그 부모님들과도 잘 아셨다.

우리 친구들도 우리 부모님은 다들 잘 알고 있었다.

그것은 우리 집이 신발가게를 한 것도 큰 이유가 될 것이다.

또 다른 이유는 아버지가 피난 와서

신광교회에 발을 붙인 후에 그곳에서 열심히 봉사하셨기 때문일 것이다.

따라서 신광교회와 조금이라도 인연이 있는

친구나 그 부모님은 아버지를 잘 알았다.


우리 초등학교 무렵에 아버지는 주일학교 선생님이셨다.

주일학교에서 아버지가 맡으신 것은 신입반을 지도하는 일이었다.

그러니까 새로운 아이가 오면 신입반에 받아서

3주나 4주 정도 기본적인 기독교 교양을 훈련하고

원반에 편입시키는 일을 하신 것이었다.

신입반 선생님을 제법 오랫동안 하신 것으로 안다.


아주 유치원 때부터 교회를 다닌 친구들은

신입반을 경유하지 않았으나,

중간에 새로 나오는 친구들은 반드시 이 신입반을 거쳐야 했다.

그런 친구 가운데 조정구가 있다.

정구의 어머니(그러니까 김정기의 이모님)도 우리 교회 교인이셨다.

정구와 마찬가지로 자그마하시고 온후하신 분이셨다.

사실 나는 정구가 신광 주일학교에 다녔는지는 잘 기억이 없었다.

그런 정구가 의대 고학년 시절에

신광대학부에 잠시 출석한 적이 있었다.

이연길 목사님이라고 지금은 미국 달라스의 빛내리교회라고 하는

명망 있는 한인교회를 담임하고 계신 분이

그때 우리 대학부를 지도해 주셨는데,

정구는 그 목사님을 좋아해서 대학부에 나왔던 것으로 안다.

이 정구가 신입반의 아버지를 기억했던 것이다.

그 외에도 나중나중에 아버지 얘기를 하는 친구들이 있었다.


주일학교에서 예배 시간의 후반부에는

생일축하도 해 주고, 이야기도 해 주고 그랬는데,

그 중 한 순서가 신입반 아이들을 원반에 인계해 주는 일이었다.

신입반은 본당이 아니라 본당 뒤쪽의 작은 방에서 교육이 이루어졌다.

신입반을 수료할 때가 되면 아버지가 아이들을 죽 이끌고

본당으로 오셔서 강단에 한 줄로 세우셨다.

아버지의 호명에 따라 한 명씩 한 명씩 원반으로 들어왔다.

작게 보면 신광교회 주일학교의 학생이 되는 일이고,

크게 보면 기독교에 입문하는 일이 되었기 때문에

신입반의 경험은 당사자들에게는 오래 기억되는 일이었을 것이다.

정구는 대학부 이후에는 교회에서 만날 수가 없었다.

전북대병원에서 인턴을 할 때에도 가끔씩 만났지만

그 이후에 원대 병원에서 한두 번 만나고는 만남을 잇지 못하고 있다.


정구는 초등학교 시절에 눈 때문에 고생이 많았다.

방학 때면 수술로 인해 고역을 치르곤 했었다.

자기의 고통의 경험이 의사생활을 하면서

환자를 대하는 귀한 밑거름이 되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실제로 좋은 평판을 듣고 있다고 한다.


그 옛날의 곱상했던 신입반 선생님은

이제 인생의 종착역에서 내릴 채비를 하고 계신다.

오랜 여행의 끝에 이제 그 곱상함은 사라지고

당당했던 근육과 골격도 이제는 다 날려 버리시고

주님을 향한 열정도 그만 모두 소진해 버리셨다.

하루하루의 삶을 영위(營爲)하기 보다는

그저그저 부지(扶持)하실 뿐이다.


그러나 나는 알고 있다.

그 옛날 신입반에 뿌리셨던 작은 씨앗들이

어디에선가 풍성한 열매들을 맺고 있으리라는 것을…….

한 동안 풍파와 가뭄과 병마가 있어서

그걸 방해한다손 치더라도

잠시는 자기 자리를 떠나 있을지라도,

언젠가는 제자리에 돌아와 생명의 줄기로 장성해 갈 것이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