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글, 글과 말

시작품 번역에 대한 관견

써니케이 2006. 10. 8. 16:27

번역은 상이한 언어권의 문화를 소통시키는 작업이다.

이 작업은 단순한 언어의 변환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그 언어와 연관되어 있는 문화와 관습 등이 함께 전달되어야만 한다.

그래서 문화권이 서로 다른 언어 간에 번역은 아주 어려운 일이 되는 것이다.

한국 문학을 외국에 소개하는 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대상 언어는 영어다.

영어로 한국 문학을 어떻게 번역할 것인가에 대한 연구가 그만큼 중요하다.

문학 작품의 번역에 있어서 가장 난이도가 높은 것은 바로 시작품의 번역 작업이다.

순전히 문맥에만 의지하여 번역하는 것보다는 나름대로 번역의 원칙을 확립하고, 이에 따라 번역함으로써 작품의 의미와 표현의 다양성이 올바르게 전달될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필자의 한국현대시용례사전은 중요한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특히 각 시인별 시어의 사용 형태와 그 빈도에 대한 조사 자료는 정확한 번역을 위한 좋은 단서를 제공해 줄 것이다.

 

한용운 시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keyword)는 바로 '님'이다.

그의 고빈도 시어를 보면 '나'(359회), '당신'(261회)에 이어 제3 위(204회)를 차지할 만큼 빈도가 높다.

이 '님'을 어떻게 읽어 내느냐에 따라서 한용운 시의 의미나 상징 체계가 달리 해석되는 것은 말할 필요가 없다.

더러는 당대의 시대 현실과 관련하여 '조국'으로, 더러는 시인의 종교적 세계와 관련하여 '부처'로, 더러는 그냥 글자 그대로의 뜻인 '이상의 연인'이거나 그냥 '연인'으로 읽어낸다.

'연인'으로 볼 경우에는(혹은 연인으로 보지 않더라도) 시적 화자를 남성으로 보느냐, 여성으로 보느냐에 따라서 그 연인의 성별이 달라질 수가 있다.

결국 작품의 번역은 작품에 대한 하나의 해석이 이루어진 다음에 가능한 일이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번역자들이 해석에 대해서 두려워하는 것이 사실이다.

어쩌면 해석은 독자의 몫으로 넘기고 번역자는 중립적으로 가장 적합한 말을 찾는 것이 현명한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면 한용운 시에서 '님'을 어떻게 번역할까?

내가 제안하는 것은 'Lord'다.

실제의 본문 번역에서 '님'에 대한 호칭('님이여' 등)이라면 my Lord라 하면 되겠고, 그렇지 않더라도 '님'에 대한 표현에서도 같은 표현을 써도 무방하겠다.

(이 점은 여러 문맥을 확인하여 보충할 필요가 있다.)

Lord는 '지배자, 귀족, 하나님' 등의 의미를 가지고 있고, 시어로서는 '남편'이나 '소유자'를 뜻하기도 한다.

귀족의 남편을 둔 아내가 자신의 남편이나 연인을 '나의 주여(my lord)'라고 부르는 것이 관습이었다.

첫 글자를 대문자로 쓰느냐, 그냥 소문자로 쓰느냐 하는 문제도 조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신적인 존재까지로 확대할 경우라면 대문자로 쓰는 것도 무방하겠다.

 

이와 아울러서 제2인칭인 '당신'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의 문제도 함께 생각해 보는 것이 좋겠다.

한용운 시에서의 2인칭 표현은 다음과 같은 빈도를 보이고 있다.

당신(261회), 그대(54회), 너(41회) (*'자네'는 한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이 말들의 뉘앙스를 보다 정확하게 파악하려면 원문의 문맥을 살펴야 하겠지만, 일단 이 세 가지 표현에 대한 번역의 원칙을 어떻게 정할까 하는 것도 중요한 문제다.

'당신'의 경우만 보더라도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문맥적 의미가 있다.

(1) 대화의 상대를 가리키는 이인칭으로서, 약간의 존대를 나타내는 표현.

(2) 부부 사이에 상대편을 높여 이를 경우에 사용하는 표현. 꼭 부부 사이가 아니라    연인의 감정을 가진 사람끼리도 상대방을 높여 부를 때 사용한다.

   한편 꼭 그런 것은 아니지만, 부부 사이라면, 남편이 아내에게 '여보'라 칭하고, 아내가 남편에게는 '당신'이라 칭하기도 한다.

(3) 맞서 싸울 때 상대편을 낮잡아 이르는 표현.

(4) '자기'를 아주 높여 이르는 표현.

 

이러한 표현들을 중국어에서는 어떻게 번역할까?

'님'의 경우에 主人은 어떨까? 다른 부분은 그런대로 통하겠는데 아무래도 개인적 관계, 연인 관계의 표현으로는 적합하지 않은 듯하다.

 

'님'을 'lord'로 하여 '님의 침묵' 첫 구절은 다음과 같이 번역할 수 있다.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My Lord has gone.

Aha, my loving Lord has gone.

 

다음은 '님의 침묵'의 일부분이다. 참고로 남겨 둔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적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세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중략)............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만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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