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에 일택이는 원래 팔봉 사람이다.
할아버지가 한의원을 하신 거로 아는데,
(일택이 아버지도 같은 일을 하셨는지는 잘 모르겠다. 농협에 계셨던 거 아닌가?)
이제는 일택이가 그 가업을 잇고 있다.
일택이네는 팔봉에선 내로라하는 집안이었다.
팔봉(八峯)은 말 그대로 산봉우리가 여덟 개라는 뜻인데,
우리나라에서 자주 보는 지명이다.
여덟 개는 우리나라에선 그야말로 완전수(完全數)라 생각하는
관습이 있기에,
봉우리가 대충 6개만 있어도 억지로 8개를 맞추기도 하고,
9개 이상이 되면 두어 개는 제외해 버리는 식으로
완전수를 채우기도 하는 것이다.
어렸을 때 팔봉에 한 번 가게 되면
그 여덟 개의 봉우리를 확인하고 싶었었다.
그러나 아무리 보아도 대체 봉우리라 할 만한 곳도 없었고,
몇 군데 봉긋한 언덕을 봉우리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여덟 개를 채우기는 어려웠다.
또 하나 확인하고 싶었던 것은
과연 일택이네가 팔봉에서 꽤나 행세하는 집안인가 하는 것이었다.
늘 서글서글했고, 커다란 눈을 껌벅거리며 겸손했던 일택이,
당시로 보아서는 시내가 아닌 변방의 한 마을에 살고 있는 일택이가
뭐 그리 훌륭한 집안의 자식이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6학년 때든가 우리가 한번 팔봉으로 소풍을 간 것을 계기로
어린 나이였음에도 그것이 사실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바로 팔봉에서 일택이네 산으로 소풍을 간 것이었기 때문이다.
마을 뒤편에 있는 그리 높지 않은 산이었지만
그런 산을 자기네 산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흔하지 않았다.
게다가 그 산에는 일택이네 선조의 산소들이
여러 층을 이루어 자리 잡고 있었고,
무덤 주변의 석물도 그리 단순한 것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우리 초등학교 시절에는 팔봉 만 해도
제법 먼 곳이었다.
그 무렵에는 우리 집의 가게 하나가
신광교회 사거리에 있었고,
바로 집 옆에서 팔봉이나 금마로 가는 버스를 탔기 때문에
팔봉 사람들이 자주 우리 가게에서 쉬어 가곤 했다.
버스를 타면 마동의 캐나다 선교부를 지나서
벌건 황토가 깔려 있는 고구마 밭이나
과수원들을 지나서 그러고도 한참을 가야만 팔봉이 있었다.
마이크로버스가 다니던 시절에는
입석을 타면 고개를 제대로 쳐들지도 못했다.
겨우 천장에 뚫려 있는 환기통으로 고개를 내놓기도 했지만
쿨럭쿨럭, 덜컹덜컹 하는 버스의 요동에
많은 위협감을 느끼곤 했었다.
겨울철에는 팔봉 가는 길목에 있는
‘터질목’이란 데서 가끔씩 눈길에 미끄러지는 교통사고가
나곤 했다.
지금은 직업전문학교가 있는 곳인데
커브길인데다 급격하게 내리막 오르막이 겹치는 곳이라서
사고 소식이 없는 겨울은 없었다.
그런 바람에 팔봉은 우리 느낌으로 어디 좀 다른 세상의 곳쯤으로
느껴지곤 했다.
아마도 팔봉처럼 완전한 수를 채운 곳에 가는 길이
그리 쉽지는 않았을 것이다.
일택이는 그런 곳에서 나고 자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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