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이야기

나를 삼키는 열심(熱心)- 요한복음 2장

써니케이 2006. 5. 3. 16:38

요한복음은 "예수님은 누구신가?" "예수님은 어떤 분이신가?"에 대한 대답으로 쓴 복음서라고 한다.(이연길 목사님) 그리고 그 독자는 유대인들이 아닌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는 것으로 보인다. 요한복음에는 유난히 "유대인들의"라는 수식어가 많이 눈에 띈다. 유월절도 "유대인들의 명절인 유월절", 가나혼인잔치의 기록에도 "유대인들의 결례"라고 표현한다. 그냥 "유월절"로만 표현된 것은 바로 앞에서 "유대인들의 유월절"이라 언급한 직후에 한정될 뿐이다.

또한 요한복음의 기자는 이 "유대인들"이란 표현을 독특하게 사용하고 있다. 예수님의 공생애에서 그 걸림돌이 되고, 반발하고, 올무에 넣으려고 애쓰는 유대 사람들을 통칭하는 명칭으로 보인다. 성전 정화의 사건에서도 예수님께서 채찍을 손수 만들어 양과 소를 몰아내고, 돈을 교환하는 좌판을 뒤엎고 하는 행동을 한 후에 예수님께 항의를 하는 사람들을 가리켜 '유대인들'이라 한다. 그냥 '상인(商人)들'이라 하면 될 텐데, 성경 기자는 유대인들이라 표현하여 과연 그 사람들이 상인인지, 성정 경비병인지, 제사장들인지, 제사드리러 온 사람들인지가 불분명하게 해 놓은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요한복음에서 일반적으로 발견된다.

즉 요한복음의 기자는 자신의 기사를 읽는 독자들과 함께 반유대적인 전선을 형성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성전 정화의 사건에서 성경의 기자는 예수님을 어떤 모습으로 그려내고 있을까? 그 대답은 특별히 어렵지 않다. 기자가 스스로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을 가지신 분'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성경 기자는 시편69편9절의 '열심이 나를 삼키리라'는 구절을 회상함으로써 예수님의 열심을 극대화한다.

사람을 삼킬 정도의 열심이란 무엇일까? 사람을 삼킨다는 표현은, 거대한 동물이(고래 같은 것) 입을 벌려 통째로 먹어치우거나, 이를 비유적으로 사용하여 강렬한 불길이 일어나서 그 안에 들어 있는 사람의 모습을 보이지 않게 만들 때 사용한다. 그러니까 자신의 몸을 아주 위태롭게 할 정도의 열심이라는 말이다.

확실히 성전에서의 예수님의 행동은 너무나도 위험했다. 성전에 있는 모든 사람을 적으로 만드는 행동이었다. 일차적으로 상인들에게는 경제적인 손해를 끼쳤다. 예수님은 상인 조합의 손해배상 청구에 응할 만한 재산을 가진 분이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물리적인 충돌의 우려도 컸다. 상인의 조합은 예수님 한 분을 상대하기에 규모가 훨씬 컸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냥 구경꾼일 뿐이었다.) 성전의 경비병들은 소란을 조장하는 젊은이를 그냥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었다. 구류라도 며칠 살리고, 태질도 몇 차례 한 다음에 다시는 소란을 피우지 않겠다는 각서를 받고, '그 젊은이 꽤나 무모하구먼!' 이러면서 부모님을 오라 하여 인계하고는 나름대로는 선처했다고 말할 것이다.

제사장들은 퍽이나 괘씸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자신들의 생계에 걸린 문제일 뿐 아니라 성전의 권위에 대한 도전으로 비쳐졌기 때문이다. 뭐가 얼마나 잘나서, 얼마나 거룩하기에 이미 관습처럼 되어버린 일들을 무시해버린단 말인가? 만일에 제사장들이 '참람죄'라고 들고 나왔다면 예수님은 태질 몇 차례로 방면될 입장이 못 되는 것이다.

제사를 드리러 온 사람들은 어땠을까? 나름대로 준비하고, 열심을 내서 성전에 온 사람들, 그들도 갑자기 생긴 이 사태에 크게 당황했을 것이다. 그냥 그렇게 예전과 다름없이 제사하고, 예배하고 떠나면 될 것을, 어떤 젊은이의 행동은 무척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제사를 방해하는 젊은 친구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이 모든 힘들에 대해 아랑곳하지 않으셨다. 정말 공생애의 시작 무렵에 그 사역을 곧 바로 끝낼 수(타의로)도 있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행동은, 단 한 사람의 젊은이의 거친 몸부림이었지만 성전 안에 있는 어떤 사람도 손쉽게 제지하지 못하게 만든 힘이 있었다. 위엄이 있었다. 그 위엄 앞에 성전 안의 사람들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들은 겨우 예수님 말씀에서 '내 아버지의 집'이라는 구절을 찾아내, 그걸 꼬투리 삼아 걸고 넘어지려 할 뿐이다.

 

예수님의 열심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성전에 대한 우리의 태도와 감정을 되새겨 보게 한다. 우리는 주의 전을 위해서, 그것을 사모하여 스스로를 위태롭게 하고 있는가? 이것은 우리의 객관적 행동에 관한 질문이 아니다. 주일에 단정한 옷을 입고, 시간에 맞춰 빳빳한 신권이 들어 있는 헌금봉투를 들고 예배에 참석하는 일, 성도들과 목사님을 만나 기쁘게 인사하고 안부를 묻는 일, 예배를 마치고 함께 밥을 먹고, 차를 마시며 교제하는 일, 성경공부 반에 들어가서 예습한 것을 표현하며 열심히 토론하는 일, 주말에 비를 들고 교회의 마당을 정성스럽게 쓰는 일...

당시의 유대인들도 그랬다. 먼곳에서 제물을 가져오며 혹여 흠이라도 생길까 봐 성전에서 제물을 직접 구하는 일, 성전의 당국자들이 원하는대로 세금을 내기 위해서 돈을 바꾸는 일. 그것은 열심이 아니었다. 적어도 성경 기자의 눈으로 보기에는 말이다. 아니, 정말 정성을 다해서 멀리서 제물을 직접 운송해 왔다고 치자. 주인의 말대로 졸졸 잘 따라오는 양은 없다. 성전에 제물로 드릴 양을 가져오기 위해서는 차라리 어깨에 둘러메고 오는 편이 더 낫다. 정말 힘이 들 것이다. 그래도 그 제물이 있어야만 한 해 동안 지은 죄를 사면 받을 수 있는데,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스스로 어깨에 메고 온 것을 하나님도 아실 것이리라 자위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공덕(功德)일 뿐이다. 사모(思慕)함이 아니다.

혹 하나님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 예배시간에 맞추기 위해서 과속에 신호위반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닌지? 새벽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해서 횡단보도가 아닌 곳을 무단으로 건너가는 것은 아닌지? 그렇다. 그러한 행동은 '그'를 삼킬 수 있다. 위험한 일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무것도 아니다. 그 무엇도 못 된다. 어리석은 일일 뿐이다.

성경의 기자도 몸을 삼킬 정도의 열심을 궁금해했다. 그러나 그가 성전의 제사에 참여하면서 오랫동안 궁금해 해왔던 시편의 표현 '전을 사모함'의 현실을 목격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 그것을 본 것이다. 정말 '그 열심이 자신을 삼킨다'는 것의 실체를 경험한 것이다. 예수님은 그런 열심, 열정의 분이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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