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12.8 김병선 개인 홈피에서 옮김]
"계속 말씀하시라니깐요!" 어떤 프린터 회사의 여직원이 나에게 한 말이다. 고장수리 접수를 하면서 수화기로 들려온 다소 지친, 그러면서도 퉁명스럽기까지 한 말이었다. 분명 나는 전화로 전화통화답게 정상적으로 말하고 있었는데, 그 여직원은 대면해서 대화하듯 말하라고 요구한 것이었다. 나는 차근히 그 여직원의 태도에 무엇이 문제인가를 지적해 주었다.
전화 통화에서는 사람들끼리 얼굴을 맞대고 애기할 때와는 다른 예절을 필요로 한다. 상대방의 얘기 중간중간에 '네!', '아!. 그렇군요.' 등등 대면하여 대화할 때에는 하지 않는 말을 하게 된다. 이 말의 기능은 '당신 말의 뜻을 내가 잘 이해하고 있소.'라는 언어의 정보적 기능이 아니라, '내가 당신 말을 잘 듣고 있소. 당신과 나 사이의 의사소통의 통로가 제대로 열려 있소.'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는 상황적 혹은 친교적 기능과 관계되어 있다. 그 여직원은 내 설명에도 불구하고, 그러나 끝내 자신의 태도를 고치지 않았다. 이미 전화가 널리 보급된 사회에 태어나 성장하여, 자신도 내 입장이 되어 본 적이 있을 텐데도 불구하고, 버릇인지, 업무에 피로한 탓인지...
컴퓨터 통신망은 새로운 통신 매체다. 더 정확히 표현한다면 의사소통(communication)의 새로운 통로(channel)라고 할 수 있다. 통로의 변화는 의사소통에 관계되는 모든 요소들 (발신자, 수신자, 메시지 등)에 큰 영향을 미친다. 비록 전화선을 이용하기는 하지만 전화 통화와는 다른 점이 많다.
PC통신은 편지나 전보처럼 문자를 매체로 한다. 발신자와 수신자는 직접적으로 대면하고 있지 않는다. 전자대화(채팅)의 경우는 동시에 어떤 대화방에 들어와 있는 가입자끼리, 전자게시판의 경우는 불특정 다수의 가입자가 서로 발신자와 수신자가 된다. 대화의 통로는 동시에 열려 있어야 하지만, 게시판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전화로 비유한다면 전자대화는 직접 수화기를 들고 얘기하는 것과 같고, 제시판은 자동응답기에 녹음된 메시지를 사후에 듣는 것과 같다. 전자우편의 경우는 편지가 신속하게 전달된다는 것, 자동적으로 등기 우편의 기능을 한다는 것, 반송우표를 동봉한 것과 같은 효과를 나타낼 수 있다는 것(답장 요망 편지), 모든 내용을 전산 자료화해야 한다는 것 외에는 일반적인 편지와 동일하다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대면하지 않고, 문자로만 모든 의사를 전달해야 하며, 문자를 사용하기는 하지만 전자대화처럼 즉각적으로 의사 교환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편지와는 다른 면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이 새로운 통로에 적응해야 한다. 문자를 매체로 한 PC 통신은 문자가 지닌 한계를 고스란히 물려받았다. 즉 말할 때에는 표정과 억양, 몸짓과 액센트를 동반할 수 있고, 상대방이 자기 말을 제대로 듣고 있는지의 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PC 통신에서는 도무지 이러한 언어를 사용할 수 없고 단지 문자로만 처리해야 한다. 따라서 문자를 가지고 표정을 살리는 글을 써야 한다는 과제가 주어진다. 표정을 살리는 대표적인 방법은 감탄사를 쓰는 것이다. 필요 이상으로 사용해서 안 되겠지만, 앗!, 히유-, 어머나 등등의 감탄사를 적절히 사용하면 글에 생동감이 넘친다. PC 통신에서의 전자대화는 대부분 온-라인 상에서 직접 타자하면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대면해서 하는 대화보다도 길어지는 것이 보통이다. 통신의 시간적 길이는 통신이용료 뿐만 아니라, 전화요금과도 관계가 있어서 이를 적절히 조절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글의 내용을 적절히 줄이는 것도 중요하다. '앗! 내 실수. 병선님. 죄송!' 이러한 표현은 간결하기도 하면서 또한 표정도 잘 살리고 있다. 또한 자판에 있는 부호를 사용해서 의사 표현을 하고, 표정을 나타내는 것도 좋다. '???' 대단히 의문스럽다는 표현, '!!!' 틀림없으니 제발 믿어달라는 표현 등.
공개적인 전자대화는 불특정 다수를 대화의 상대로 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일단 경어체로 말하는 것이 기본이다. 물론 상대방과의 합의에 의해서 대화의 수준을 얼마든지 바꿀 수도 있다. 그러나 항상 서로 얼굴을 대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게시판에서는 누구라도 쉽게 자신의 글을 올릴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신문이나 잡지 등의 매체에서는 걸러질 수 있는 내용과 표현의 글들이 난무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특히 어린 학생들의 글에서 그러한 것들이 눈에 띈다. 사투리나 비어, 속어 등의 사용은 어떨까? 나는 그것도 가능하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러한 표현들은 비록 맞춤법이나 정서법, 표준어 규정에서 벗어난 것이기는 하지만 그런 점에서 오히려 글의 표정을 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전국 각지의 가입자가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의 특성을 나타내기 위해서 사투리를 사용하는 것을 나쁘다고 할 수 없다. 물론 정상적인 표현에서 벗어나는 표현을 할 때에는 반드시 충분히 이러한 사실을 인식하고 있어야 한다. 중고 시장 게시판에서 '○○파라여!'라는 표현이 특히 눈에 많이 띄는데, 한 두 번은 애교로 넘겼으나, 요즈음은 정말 정확한 표현을 모르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 정도이고, 이 표현은 이미 개성을 상실한, 이제는 표정없는(?)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단지 흉내내거나 정확한 표현에 대해서 무지한 채 그러한 표현을 계속 사용한다면 이는 문제가 된다. 작가들의 경우에 이처럼 좀 벗어난 표현을 할 때에는 해당 어구의 뒤에 (?)표시를 해두는 것이 보통이다.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이도저도 아니고 아예 틀린 표기들이다. 학생들이 올린 <팝니다>란에서는 Panasonic 카세트를 '파라소닉'이라고 표기한 것들이 눈에 띈다. 맞춤법에 너무 벗어난 표기들도 보인다. 이런 모든 문제에 대해서 통신 가입자의 분별과 능동적인 언어 생활에 대한 적극적인 참여가 필요하다. PC 통신사에서도 이를 적절히 점검하고 규제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하지만 규제보다는 가입자의 노력에 의해서 새로운 의사소통의 수단을 일구어나가야 할 것이다. 고식적이고 너무나 규범적이어서 따분한 재미없는 통신사회가 아니라, 재치와 유머가 넘치는, 필자의 표정을 엿볼 수 있는 그러한 통신 마당이 열리기를 바란다.
-<중앙일보>에 실렸던 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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