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기네 녹음기 사건을 말했으니 기계에 대한 내 호기심에 대해서는 다 아시리라 생각한다. 초등학교 6학년 쯤에는 광석라디오 정도는 직접 조립할 수 있게 되었고, 중학교 때에는 2석 라디오도 만들어 본 일이 있다. 광석라디오라는 것이, 작은 광석(검파용 게르마늄 다이오드)을 연결하고, 거기에 이어폰을 붙여서, 전깃줄에 안테나를 묶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냥 방송은 대표적인 거 하나만 들린다. 집에 있던 금성(Gold Star) 상표의 진공관 라디오는 거의 내 장난감이었다. 수없는 실험을 통해서 라디오 뒤에 나와 있는 두 개의 단자에 크리스털 이어폰의 두 선을 연결하면 그것이 앰프로 변한다는 사실을 발견하였다. 너무 신이 났다. 음질이 무슨 상관이랴! 그냥 소리가 증폭되어 온 방안을 울리는데 말이다. 더 나아가서 이웃집 하숙생의 방까지 줄을 늘이고, 스피커를 달아서 간이형 트랜시버로 사용하기도 했고, 급기야는 자체적인 방송국을 차려 보기도 했다. 방송국이라는 것은 그냥 아까 그 라디오 앰프에서 스피커로 가는 선을 잘라내 두 선을 자그마한 철사 양쪽에 묶는 것이었다. 스피커의 음과 양으로 가는 신호가 그 철사에서 맞부딛혀서 전파의 형태로 튀쳐 나갈 것이라는 믿음에서 출발한 일이었다. 나는 그 방송국의 아나운서가 되어, 크리스털 이어폰 마이크에 입을 가까이 대고 여러 가지 얘기를 주절거렸다. 그것이 방송이 되는지 아닌지를 확인하지는 못했다. 주변의 라디오에서 사이클을 아무리 돌려봐도 내 방송은 들리지 않았다. 그냥 그 라디오 성능이 안 좋은 것으로 치고, 그냥 공허한 우주로 통하는 방송은 당분간 계속되었다. 이러한 나의 관심은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보다 형식적인 모임을 결성하는 것으로 발전되었다. 중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에서 만났던 친구가 발진기라는 것을 들고 와서 ‘삑삑’ 소리를 자유자재로 변환시켜 가며 나를 주눅 들게 만든 다음 일이었다. 그 모임의 이름이 남중동인회(南中同人會)다. 남중동에 사는 친구들이 동인 모임을 만들었다는 뜻이다. 동인회 사무소 및 실험실은 바로 우리 집이었다. 몇몇 친구들이 모였다. 그 중에 한 명이 초등학교 때부터 같이 다닌 임두원이다. 이종희라는 중학교 친구도 있고, 그 이웃집 하숙생도 있고, 이름도 기억 나지 않는 친구들이 있었다. 한 주일에 한번씩 모여서 이것 저것 실험 이야기며, 새로운 정보 등을 나누었다. 그러다가 우리들의 관심이 전자공학 쪽으로부터 기계공학 쪽으로 전환되었다. 즉 소형 모터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이었고, ‘마부치’라는 모터가 최고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여러 날 뒤에 우리는 멀지 않은 전파상에 그 모터가 많이 들어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가서 보니, 새것은 아니었고 다른 기계 부품에서 뜯어낸 것들이었다. 아무렇게나 수북히 쌓여 있었지만 가격은 만만치 않았다. 동인들 그 누구도 살 만한 여유가 없었다. 그림의 떡이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물건을 확보하고자 하는 우리의 열망은 자금의 부족이나, 윤리 의식의 통제나, 주인 아저씨의 경계망을 뚫고야 말았다. 일행 중 몇 녀석이 이 물건 저 물건을 뒤지고, 들여다 보다가는 그 모터 중 몇 개를 주머니에 넣고 만 것이다. 그 장면을 나도 보았다. 그러나 어쩔 수가 없었다. 이미 일이 벌어졌고,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제는 그저 무사히 가게를 빠져나가는 길 밖에 없다. 우리는 몇 분의 시간을 그 가게에서 더 보내다가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나가려 했다. ‘안녕히 계세요!’ 인사를 하고 가게 문을 나섰다. 그 순간 주인 아저씨께서 우리를 불러 세운다. ‘아뿔싸!’ 주인 아저씨는 우리가 문을 나서는 순간을 기다렸던 것이다. 그리고는 정확하게 ‘세비친(물건을 훔친)’ 친구들만 남기고 나머지는 가라고 하신다. 그날 부로 남중동인회는 해체되었다. 우리의 한계는 거기에 있었다. 호기심과 관심은 많았으나 그걸 실현시킬 만한 재정적인 뒷받침이 없었던 가난한 동인들은 자가발전(自家發電)만으로는 더 이상의 발전을 도모할 수 없었던 것이다. 아들 놈 둘을 키우면서 나는 일종의 보상심리의 행동을 하고 있다. 아이들이 요청하기 전에 먼저 그들의 호기심과 관심을 채워줄 만한 물건을 사준다. 그리고 열심히 상담에 응할 준비를 해 둔다. 애들이 2001년에 미국에서 돌아오기 전에도 그랬다. PS2가 한국에서 출시되자 마자 한 세트를 사 두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무덤덤한 아들 놈들은 그냥 당연하다는 듯 선물 보따리를 풀었다. 그리고는 이내 게임에 빠져 들었다. 나는 그만 하릴없는 남중동인회 Old Boy 신세일 뿐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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