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4학년 무렵으로 기억한다. 국어 시간에 늘 나를 속 썩이던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바로 반대말 찾기였다. 시험 볼 때 한 번도 제대로 맞힌 적이 없었다. 나는 그 문제 때문에 속이 썩었고, 아버지는 그런 나 때문에 속이 썩으셨다. 아마 선생님도 다른 것은 잘 하면서도 도무지 반대말을 이해하지 못하는 나를 이해 못하셨을 것이라고 본다. “‘가다’의 반대말은 ‘오다’란다. 내가 가면 저쪽에서 오고…. 그게 반대지, 어떻게 안 간다고 하느냐 말이다.” "가다-안 가다, 자다-안 자다, 이런 식이라면 문제를 못 풀 놈이 어디 있겠냐?" 아버지는 말귀를 못 알아듣는 아들에게 무척 실망한 표정이었다. 그 아들은 자기가 무슨 갈릴레오라도 되는 양 여전히, ‘자다’의 반대말은 ‘안 자다’, ‘올라가다’의 반대말은 ‘안 올라가다’ 라고 함으로써 그 실망의 깊이를 더 깊게 만들고 말았다. 국어 시간에 여러 사람을 실망시키던 그 아들이 국어 선생이 되고 말았다는 사실은 참으로 아이러니칼한 일이다. 하지만 그 어이없는 반대말 찾기로부터 40년도 넘은 오늘날까지 나는 여전히 ‘가다’의 반대말로 ‘안 가다’보다 더 적합한 것을 찾지 못하고 있다. 나아가서는 그것이 맞다고 강변하고 있으며, 이제는 그때 제대로 설명하지 못한 이유를 어느 정도는 말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자, 이렇게 생각해 보자. 반대말 찾기에서 그 ‘간다(go)’는 행동 자체로 보지 말고, 그 행동의 주체를 기준으로 생각해 보기로 하자. 가령 ‘내’가 가는 행동이 있다면, 이럴 때는 ‘내’가 안 가는 행동이 확실히 반대 개념이다. 내가 꾀병을 부려서 학교에 안 갔다면, 그걸 알게 된 아버지는 매를 드셨을 것이다. 즉 '가냐, 안 가냐', 그것이 문제인 것이다. 햄릿의 저 유명한 대사를 기억해 보라. 'To be or not to be, that's the question!'
‘내’가 어디로 갔다가 다시 돌아온다든지, ‘내’가 아닌 다른 어떤 사람이 ‘나’에게 오는 것은 ‘내’가 가는 행동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전자는 행동에 있어 시간의 차이가 있는 개념이고, 후자는 행동의 주체가 달라지는 개념이다. 그러니 지금 이 자리에서 어떤 주체가 어떤 행동을 하는 것의 반대는 당연히 부정사 ‘안’을 붙여서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잠을 ‘깨는’ 것은, 내가 잠을 ‘자는’ 행동이 완성된 다음에 일어나는 일이다. 지금 중요한 것은 내가 잠을 자느냐 잠을 안 자느냐 하는 것이다. 그리고 '공부하다'의 반대 개념이 '놀다'인가,' 운동하다'인가, '채팅하다'인가, '잠자다'인가? 그냥 '공부 안 하다'가 맞지 않겠는가? 말이 좀 복잡해졌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가다’의 반대가 ‘안 가다’, ‘자다’의 반대가 ‘안 자다’, ‘오르다’의 반대가 ‘안 오르다’라는 것이다. 최대한 양보한다 하더라도 이러한 대답이 결코 틀린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주체적 행동의 반대와 대립에 대한 개념 정립이 없이 어떻게 행동의 선택 범주를 깊이 생각할 수 있겠는가? 하여튼 중고등학교에 가서도 국어 시험 성적이 내놓을 만한 것이 되지 못했음은 다소간 이처럼 엉뚱한 생각의 간섭 때문이었다고 본다. 하지만 아무리 엉뚱하다고는 해도 절대로 ‘해’의 반대말을 ‘별’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어느 유치원의 벽보에서 본 내용)
반대말 찾기는 이치적(二値的) 사고력과 관계된 것인데, 세상의 모든 사물과 사태가 과연 이치적으로 설명될 수 있을지는 여전히 의문이다. 결과적으로 나는 반대말 찾기의 무용론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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