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이야기

신발가게의 추억

써니케이 2006. 5. 29. 10:18

‘광신고무상회’ (‘狂信’으로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廣信(널리 믿음)’이다.)

이것이 우리 집에서 운영하는 사업체의 공식 명칭이었다.

바로 옆 가게인 ‘신광철물상회’와 더불어 중앙시장의 거의 정중앙에 자리잡고 있었다.

(두 상회의 주인들이 모두 신광교회와 관련이 깊은 분들이셨다.

철물점의 주인은 박병석 장로님, 고무신집 주인은 김용삼 집사님, 후에 장로님이셨다.)

상호의 마지막 글자가 ‘회(會)’자인 관계로 요즘 같으면

우리 아버님이 소위 ‘회장님’이셨겠지만

그 당시에는 ‘사장님’ 소리도 아무나 듣는 게 아니었기 때문에

그냥 ‘신발 가게 주인’으로 통하셨다.

너댓 평 쯤 되는 가게 안은 선반이 ‘ㄷ’자로 둘러 있었고,

중앙 부분에는 좌판이 있었다.

바닥은 그냥 흙바닥이었다. 새카맣고 반질반질할 정도로 매끈했다.

천정은 다락을 하나쯤 매어도 될 만큼 높았다.

가게는 일년 내내 열려 있었다. 아침에 문을 열면 저녁에 문을 닫을 때까지

그냥 개방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한 겨울에는 연탄 화덕이 들어 가는 간이 온돌에서

담요를 덮어쓰고 손님들을 기다렸다.

신발을 사러 오는 손님들도 일단 그 담요 밑에서

손을 녹인 다음에 일을 보곤 했다.

때가 되면 거기서 밥도 먹는다.

모자라거나 남거나 상관 없이 신발 손님이 오시면

함께 먹자고 하는 것이 인사였다.

그냥 인사치레가 아니라 조그만 밥상에서

포기 김치를 죽 찢어서, 함께 식사하곤 했던 것이다.

바닥에는 신발을 신어 보게 만든 굽이 달린 자그마한 나무 판이 놓여 있었고,

돈궤만큼은 미군들 탄약 상자를 사용해서 튼실했었다.

거기서 우리 식구는 생계를 유지했다.


지금 기억으로 가장 신나는 때는 명절 때였다.

누구라 할 것 없이 설이나 추석 때에는 신발을 사 신었다.

그리고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다음 명절을 기다려서 신발을 샀다.

명절 대목에는 온 중앙시장이 인산인해였다.

(목욕탕들도 대목이었다.)

우리 집도 마찬가지였다.

신발은 옷가지와 더불어 생활필수품이었던지라

손님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온집안 식구와 친척들까지 동원되어

문수를 맞추어 주고, 포장을 해 주고, 계산을 하고 하면서

한나절을 손님들과 실랑이를 벌이고 나면

돈궤에는 정말 수북히 지전들이 쌓였다.

그게 얼마쯤이었는지는 모르지만 하여튼 한 보따리에 가득했다.

그리고 그런 명절 대목을 지내고 나면

그냥그냥 그럭저럭 대강대강 생계나 유지했다.

그래도 아들 딸을 사립학교에 보낼 수 있었던 것은

우리 동창네 어머니들이 열심히 이용해 주었고,

교회의 사람들도 우리 집을 찾아준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막내딸은 공립을 갈 수밖에 없었다.)

가끔은 식모도 있었고, 종업원도 채용하기도 했지만

살림은 거기서 거기였다.


그 어렸을 때 신발이라면

고무신이나 운동화, 그리고 여름철의 장화와 겨울철의 털신 같은 것 밖에는 없었다.

그래도 도시 지역이라서 우리 친구들은 다들 운동화를 신고 다녔지만

당시 시골에서는 고무신을 질질 끌고 다녔었다.

여학생 운동화는 ‘맹꽁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앞이 뭉뚝한 햐얀색 신발이었다.

그 하얀색을 유지하기 위하여 별도로 표백제도 팔렸던 것으로 기억한다.

남학생 운동화는 '스파이크'라고 불렸다.

왜 그렇게 불렀는지는 모르겠지만, 바닥에 스파이크가 박혀 있지도 않았고,

배구 전용 운동화도 아니었던 것만은 틀림없다.

하기야 당시에 운동화에 무슨 종류가 있었으리요….

운동화든 고무신이든 그때는 질기지 못했다.

고무신은 작은 충격에도 찢어지기 십상이었고, ‘빵구’ 내는 것은 일도 아니었다.

곱게 신고 다니는 여학생 운동화는 바닥이 달아서 못 신게 되었지만

그것도 몇 달을 넘기지는 못했다.

이리저리 구르던 남학생 운동화는 실밥이 뜯기거나

고무와 접합한 부분이 터져서 더 신지 못하는 일들이 있었다.


어머니는 눈대중의 선수였다.

손님들의 발 치수를 거의 놓치는 법이 없었다.

아니 나중에는 그냥 ‘누구’ 하면 ‘얼마’라고 답변이 나올 정도였다.

그때는 사람들의 정이 훨씬 깊은 때였던지라

‘누구네 집’ 하면 그 집의 모든 식구들의 이름과 신발 치수가

어머니의 데이터베이스에 기록되어 있었다.

도중에 문수가 mm로 바뀌는 과정이 있었지만

상당 기간 두 체계가 공존하였으므로

무난히 데이터베이스는 운영될 수 있었다.


광신고무상회는 내가 대학 가던 해에 문을 닫았다.

신발 가게들이 많이 생겨났고,

특히 젊은 사람들이 가게를 열면서

구닥다리 가게의 단골이었던 분들이 새로운 가게로 옮기는 일이 많아졌다.

신발도 패션의 개념에 들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게다가 신발은 왜 그렇게 질겨졌는지, 한 켤레를 사 가면

그 다음 명절에도 나타나지 않는 것이다.

왜? 안 떨어졌는데 왜 또 새로운 신발을 사겠는가 말이다.

그리고 사실 이문도 낮았다. 100원 짜리 신발을 팔면

10원이 남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런 상황에서 나이 드신 신발가게 주인은 새로운 패션 감각에

눈을 뜨지 못하셨고, 그에 따라 재고는 나날이 쳐졌다.

무엇보다도 고무신 장사에 재미를 못 붙인 신발가게 주인은

감초다, 감자다, 산도(山稻)다 이런 농사에 맛붙여서

가게 운영을 소홀히 하였고,

믿었던 땅마저도 배신을 하는 바람에

(감초 농사 3년 하고는 쫄딱 망했다!)

3칸 짜리 오두막도 팔아버리고

결국 20년 가까이 운영하던 사업체도 정리하고야 말았던 것이다.


그래도 어쩌면 그때 정리했던 것이

백번 잘한 일이라고 본다.

잠시 뒤에는 삼화고무, 만월고무, 은성고무, 경성고무, 국제고무 등이

나이키, 아디다스, 미즈노 등과 싸우게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고무신 장사도 그만 둔 지 어언 30년이 된다.

어머니의 데이터베이스는 이미 활동을 멈추었다.

오랜 기간 차가운 겨울 바람에 노출되어 있었던

무릎의 관절이 염증으로 다 마모되어

노구(老軀)의 움직임에 많은 불편을 주고 있다.

그것만이 신발 장사의 기억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