槿丁 曺斗鉉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기 시작했던 것은 南星高等學校의 漢文 시간에서였다.
당시 우리들 사이에서는 선생님이 우리나라의 한문 사대가 중의 한 분이시라는 말이 돌았다. 솔직히 처음에는 잘 믿기지 않았으나 막상 수업 시간에 선생님을 뵈니까 그 말이 사실이겠구나 하는 확신이 들게 되었다. 그런 훌륭한 선생님께 한문을 배운다는 것을 큰 긍지로 느꼈으며, 선생님께서 소수 지으신 敎材와 參考書들을 대하고부터는 정말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선생님의 記憶力이었다. 선생님은 五言이건 七言이건, 絶句건 律詩건 간에 못 외우시는 시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런 한시들을 칠판에 적어 주실라 치면 첫 행부터가 아니라 마지막 행부터 역으로 적어 주시는 것이었다. 우리는 선생님께서 적어 주신 순서대로 노트에 받아 적었는데, 결국 시를 거꾸로 적는 꼴이 되었던 것이다. 시를 원래의 순서로 외우기도 힘든 일인데, 거침없이 거꾸로 적어 가시는 선생님의 실력엔 감탄과 존경의 찬사가 자연스레 우러나왔다.
선생님은 나의 대학 시절에도 삼년 동안이나 한문 강의를 담당하셨다. 고등학교 때의 훌륭한 은사를 다시 뵙게 된다는 기쁨으로 항상 즐거웠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다니는 동안에도 어쩌다 우리 대학에 출강하시는 선생님을 뵙게 되면 늘 격려와 충고를 아끼지 않으셨다. 선생님께서 내게 베풀어 주신 정은 친부모의 정―그것이었다. 그러한 정으로 해서 내가 여러 가지로 어려움에 처했을 때 위로와 격려를 해 주셨고, 모교의 교수 직을 얻게 되었을 때에는 가장 기뻐해 주셨던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에 내가 노트 정리하는 것을 보시고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칠판 판서를 내게 맡기시기도 했다. 그리고는 늘 하시던 말씀이 있었다.
“병선이가 글씨를 참 잘 써! 나보다도 잘 쓴다니까. 너희들도 병선이같이 써라.”
칭찬과 격려의 뜻이셨겠지만 나로서는 퍽이나 송구스러운 말씀이었다. 이 말씀을 대학의 강의 시간에도 늘상 하시곤 하셨다.
그러나, 아무리 따져 보아도 ‘靑於藍’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선생님의 칠판 글씨는 나로서는 도저히 따를 수 없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그 온화하신 성품만큼이나 칠판 글씨도 여리게 쓰셨다. 그러면서도 힘 줄 곳과 삐치는 곳 등이 그 글씨로 다 표현되었던 것이다. 글씨의 고르기도 따를 수 없었던 것이며, 분명하게 그으시는 획의 모습도 참으로 선명하였다. 대학의 강단에 서서 칠판에 漢字를 쓸 때마다 나는 가장 이상적인 칠판 글씨로 선생님의 글씨를 생각하고 있다.
한문 시간에 선생님은 항상 ‘글씨는 만년필로 써야지 볼펜으로 써서는 늘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리고는 선생님이 쓰시던 제일 값싼 파이로트 만년필을 꺼내 보이시곤 하셨다. 선생님의 가르침은 일견 소박한 듯하면서도 진리에 가까운 것이었고, 낮은 목소리였지만 깊은 감동을 주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내게 글씨는 만년필로 써야 는다는 가르침을 통하여 인생살이에서 어떻게 하면 ‘나’를 계발시킬 수 있는가 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鶴壽千年] 槿丁 曺斗鉉 先生 頌壽 詩文集, 금성교과서(주), 1985.10.
槿丁 曺斗鉉 선생님께 가르침을 받기 시작했던 것은 南星高等學校의 漢文 시간에서였다. 당시 우리들 사이에서는 선생님이 우리나라의 한문 사대가 중의 한 분이시라는 말이 돌았다. 솔직히 처음에는 잘 믿기지 않았으나 막상 수업 시간에 선생님을 뵈니까 그 말이 사실이겠구나 하는 확신이 들게 되었다. 그런 훌륭한 선생님께 한문을 배운다는 것을 큰 긍지로 느꼈으며, 선생님께서 소수 지으신 敎材와 參考書들을 대하고부터는 정말 우쭐한 기분이 들었다. 무엇보다도 우리를 놀라게 한 것은 선생님의 記憶力이었다. 선생님은 五言이건 七言이건, 絶句건 律詩건 간에 못 외우시는 시가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이런 한시들을 칠판에 적어 주실라 치면 첫 행부터가 아니라 마지막 행부터 역으로 적어 주시는 것이었다. 우리는 선생님께서 적어 주신 순서대로 노트에 받아 적었는데, 결국 시를 거꾸로 적는 꼴이 되었던 것이다. 시를 원래의 순서로 외우기도 힘든 일인데, 거침없이 거꾸로 적어 가시는 선생님의 실력엔 감탄과 존경의 찬사가 자연스레 우러나왔다. 선생님은 나의 대학 시절에도 삼년 동안이나 한문 강의를 담당하셨다. 고등학교 때의 훌륭한 은사를 다시 뵙게 된다는 기쁨으로 항상 즐거웠었다. 대학을 졸업하고 대학원에 다니는 동안에도 어쩌다 우리 대학에 출강하시는 선생님을 뵙게 되면 늘 격려와 충고를 아끼지 않으셨다. 선생님께서 내게 베풀어 주신 정은 친부모의 정―그것이었다. 그러한 정으로 해서 내가 여러 가지로 어려움에 처했을 때 위로와 격려를 해 주셨고, 모교의 교수 직을 얻게 되었을 때에는 가장 기뻐해 주셨던 것이다. 고등학교 시절에 내가 노트 정리하는 것을 보시고 선생님은 수업 시간에 칠판 판서를 내게 맡기시기도 했다. 그리고는 늘 하시던 말씀이 있었다. “병선이가 글씨를 참 잘 써! 나보다도 잘 쓴다니까. 너희들도 병선이같이 써라.” 칭찬과 격려의 뜻이셨겠지만 나로서는 퍽이나 송구스러운 말씀이었다. 이 말씀을 대학의 강의 시간에도 늘상 하시곤 하셨다. 그러나, 아무리 따져 보아도 ‘靑於藍’이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선생님의 칠판 글씨는 나로서는 도저히 따를 수 없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그 온화하신 성품만큼이나 칠판 글씨도 여리게 쓰셨다. 그러면서도 힘 줄 곳과 삐치는 곳 등이 그 글씨로 다 표현되었던 것이다. 글씨의 고르기도 따를 수 없었던 것이며, 분명하게 그으시는 획의 모습도 참으로 선명하였다. 대학의 강단에 서서 칠판에 漢字를 쓸 때마다 나는 가장 이상적인 칠판 글씨로 선생님의 글씨를 생각하고 있다. 한문 시간에 선생님은 항상 ‘글씨는 만년필로 써야지 볼펜으로 써서는 늘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리고는 선생님이 쓰시던 제일 값싼 파이로트 만년필을 꺼내 보이시곤 하셨다. 선생님의 가르침은 일견 소박한 듯하면서도 진리에 가까운 것이었고, 낮은 목소리였지만 깊은 감동을 주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내게 글씨는 만년필로 써야 는다는 가르침을 통하여 인생살이에서 어떻게 하면 ‘나’를 계발시킬 수 있는가 하는 방법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鶴壽千年] 槿丁 曺斗鉉 先生 頌壽 詩文集, 금성교과서(주), 1985.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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