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길 원하는 글들

번호의 기억

써니케이 2007. 4. 14. 23:13

3890

앞 차 번호판의 숫자를

읽는 순간

내 머릿속에서는

활발한 연산이 일어난다.

놀음판의 숫자가 아니다.


언젠가 보았던 번호라는

생각과 동시에

공중전화 부스 안에서

떨리는 손가락으로

다이얼을 돌리던

내 모습이 그려진다.


맞다.

그녀의 집 전화번호였다.

3...8...9까지 돌리고도

마지막 0을 포기한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막상 전화가 걸려도

이내 끊어 버린 일도 있지 않던가?


30년이 지나면,

한 세대가 완전히 가버리면,

그런 어설픈 행동과

형편없던 태도와

용기 없던

그런 젊은 날의 어리석음은

잊혀지리라 생각했었다.


그 동안 받은 수많은 명함과 명단의

번호들은 거의 대부분

기억에서 사라졌는데

왜 그 번호만큼은

아직도

뇌의 깊숙한 저장고에

싱싱하게 살아 있는 것일까?

 

오늘은

하릴없이

받을 사람 없는

옛 번호를 눌러 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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