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걸하지 않는 걸인들
이들을 과연 무어라 불러야 좋을까?
남들이 다 자기 집을 찾아 돌아가는 늦은 밤에도 여전히 거리를 배회하며
적은 푼돈을 바라고 있는 사람들 말이다.
가장 손쉬운 말이 '거지'다.
좀 더 문학적인 표현을 한다면 '걸인'이라 할 수도 있다.
옛날에는 다리 밑에 거적이라도 치고 나름대로 자기 집입네 하던 그들이지만
요즘엔 그냥 도심에서 밤을 지샌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집 없는 자(homeless)라는 편견 없는 말로 불리기도 한다.
단지 집만 없지, 자기 생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국민소득이 세계 최고 수준인 스웨덴, 노르웨이 같은 복지국가에는
아직 가보지 못해서
그런 나라에도 과연 거지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해소되지는 못했지만
웬만한 선진국에도 다 거지는 있다.
이곳 헝가리, 내가 사는 페치에도 거지가 있다.
이들은 대부분 대형 마트를 본거지로 삼고 있다.
A마트에는 하얀 수염을 기른 사람이,
B마트에는 조금은 사납게 보이는 여자가 항상 진치고 있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는 자기 구역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유럽의 관광지에서는 관광객이 다니는 길가에 그저 절하듯이 몸을 굽히고
동전을 갈구하는 모습의 거지들을 볼 수 있지만
이곳의 거지는 그냥 마트 문 옆에 하릴없이 서 있을 뿐이다.
그들은 대부분 낡은 장바구니 하나를 들고 있으며,
낡은 의복과 더부룩한 머리 그리고 남자라면 긴 수염을
여자라면 긴 머리를 하고 있다.
처음에는 이들이 거지일까, 아닐까 하는 의문이 있었다.
행색은 거지처럼 보이지만 섣불리 적선이라도 했다가
뜻밖의 봉변을 당할 수도 있기에
오래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쩌다 그들애게 적선을 하고 가는 현지인들을 보면서
거지라는 생각을 굳혔다.
약간 고민했던 이유는, 결코 그들이 구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부분 물건을 나르는 카트 보관소 옆에 자리를 잡고 있다.
차에다 물건을 싣고 난 다음에 손님들이 반드시 카트를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하기 때문에
이 거지들을 접촉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거지들의 전략은 오로지 좋은 목에 자리잡는 것 뿐이다.
참으로 순한 거지들이다. 결코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도 않는다.
자세히 바라다보면, 유럽인들이어서 그런지 이목구비도 선명하고
긴 수염 덕분에 그 모습 그대로 대학교 정원에라도 간다면
학생들이 고개 숙여 인사할 수도 있을 것 같은 모습이다.
세상에 이처럼 차분한 거지가 어디 또 있을까 싶다.
이러한 그들의 태도 덕분에 제대로 적선 한 번 한 적이 없는 나도
마음에 부담을 느끼지 않고 있다.
'우는 아이 젖 준다'는 속담이 이 나라에는 없는 모양이다.
그들은 결코 보채지 않는다.
피골이 상접한 것도 아니고, 장애를 입은 것도 아니고,
허기져서 애처로운 표정을 짓는 것도 아닌 그들에게
선뜻 동전을 내밀기가 어려웠다.
더러는 화가 나기도 한다.
나라면, 카트를 자기 차 옆에 대고 물건을 싣고 있는 손님 곁에 가서
자기가 카트를 돌려놓겠다고 얘기할 것 같다.
왜냐하면 그 수고의 대가는 100포린트에 달하기 때문이다.
손님들 입장에서는 물건을 싣고 카트를 돌려놓는 것이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충분히 협상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본다.
그 돈(한국 돈으로 500원)이면, 주식으로 먹는 빵을 다섯 개는 살 수 있다.
몇 사람만 협조해 주면, 식료품 값이 저렴한 헝가리에서는 근사한 식탁을 차릴 수도 있다.
그냥 그들이 하염없이 서 있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저러한 구도가 과거에 몇 차례 실패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들을 포함해서 헝가리 사람들이
자기를 적극적으로 선전하는 데에는 요령이 없다는 것이 최근의 결론이다.
마켓에서 하는 판촉 행사도 별로 없지만, 판촉 행사를 한다고 해도
담당자들이 그냥 멀뚱멀뚱 서 있는 경우가 더 많다.
이런 풍경은 한국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어제는 마켓에서 집으로 걸어서 돌아가는 길에
아파트 단지의 쓰레기통을 뒤지는 사람을 보았다.
더러는 거지는 아닌 것 같은 사람들이 아이들과 함께
그런 장면을 연출하는 적도 있어서
나는 그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를 쓴다.
그들도 다소간 어둑할 때 남의 이목을 피해 나온다.
그런데 어제 그 사람은 나에게로 다가왔다.
뜻밖이었다.
그는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한 손을 자신의 배로 가져가면서 아주 작은 소리로 얘기를 건네왔다.
나는 무슨 소리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물건을 사고 거슬러 받은 동전이 손에 집혔다.
약소했지만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미안했다. 하지만 시장기는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것이었다.
'가난 구제는 나랏님도 못한다'는 한국 속담이 있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국민소득이 한국보다 두 배 이상 많은 일본 동경에도
어디서나 그런 구걸자들을 만날 수 있다.
러시아에선 아내에게 이혼 당하고 길거리로 쫓겨난 은퇴자들이 홈리스가 된다 한다.
한국에서는 더러 직업적인 걸인들을 볼 수도 있다.
나는 홈리스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어떠한 아이디어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런 능력도 나에게는 없다.
그러나 도움을 바라는 눈빛을 만나면 그것을 회피할 생각은 없다.
헝가리의, 구걸하지 않는 걸인들을 보면서
그 자존심, 그 의연함에 대해서 아직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언제든 내 차 옆으로 와서 그냥 밝은 모습으로
카트를 대신 옮겨 놓겠다는 신호를 주면
기꺼이 '쾨세넘(고맙다는 뜻의 헝가리 말)'이라 말할 것이다.
이들을 과연 무어라 불러야 좋을까?
남들이 다 자기 집을 찾아 돌아가는 늦은 밤에도 여전히 거리를 배회하며
적은 푼돈을 바라고 있는 사람들 말이다.
가장 손쉬운 말이 '거지'다.
좀 더 문학적인 표현을 한다면 '걸인'이라 할 수도 있다.
옛날에는 다리 밑에 거적이라도 치고 나름대로 자기 집입네 하던 그들이지만
요즘엔 그냥 도심에서 밤을 지샌다.
그런 점에서 이들은 집 없는 자(homeless)라는 편견 없는 말로 불리기도 한다.
단지 집만 없지, 자기 생업을 가지고 있는 사람도 있으니 말이다.
국민소득이 세계 최고 수준인 스웨덴, 노르웨이 같은 복지국가에는
아직 가보지 못해서
그런 나라에도 과연 거지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해소되지는 못했지만
웬만한 선진국에도 다 거지는 있다.
이곳 헝가리, 내가 사는 페치에도 거지가 있다.
이들은 대부분 대형 마트를 본거지로 삼고 있다.
A마트에는 하얀 수염을 기른 사람이,
B마트에는 조금은 사납게 보이는 여자가 항상 진치고 있는 것을 보면
어느 정도는 자기 구역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유럽의 관광지에서는 관광객이 다니는 길가에 그저 절하듯이 몸을 굽히고
동전을 갈구하는 모습의 거지들을 볼 수 있지만
이곳의 거지는 그냥 마트 문 옆에 하릴없이 서 있을 뿐이다.
그들은 대부분 낡은 장바구니 하나를 들고 있으며,
낡은 의복과 더부룩한 머리 그리고 남자라면 긴 수염을
여자라면 긴 머리를 하고 있다.
처음에는 이들이 거지일까, 아닐까 하는 의문이 있었다.
행색은 거지처럼 보이지만 섣불리 적선이라도 했다가
뜻밖의 봉변을 당할 수도 있기에
오래 지켜볼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어쩌다 그들애게 적선을 하고 가는 현지인들을 보면서
거지라는 생각을 굳혔다.
약간 고민했던 이유는, 결코 그들이 구걸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대부분 물건을 나르는 카트 보관소 옆에 자리를 잡고 있다.
차에다 물건을 싣고 난 다음에 손님들이 반드시 카트를 제자리에 돌려놓아야 하기 때문에
이 거지들을 접촉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거지들의 전략은 오로지 좋은 목에 자리잡는 것 뿐이다.
참으로 순한 거지들이다. 결코 사람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지도 않는다.
자세히 바라다보면, 유럽인들이어서 그런지 이목구비도 선명하고
긴 수염 덕분에 그 모습 그대로 대학교 정원에라도 간다면
학생들이 고개 숙여 인사할 수도 있을 것 같은 모습이다.
세상에 이처럼 차분한 거지가 어디 또 있을까 싶다.
이러한 그들의 태도 덕분에 제대로 적선 한 번 한 적이 없는 나도
마음에 부담을 느끼지 않고 있다.
'우는 아이 젖 준다'는 속담이 이 나라에는 없는 모양이다.
그들은 결코 보채지 않는다.
피골이 상접한 것도 아니고, 장애를 입은 것도 아니고,
허기져서 애처로운 표정을 짓는 것도 아닌 그들에게
선뜻 동전을 내밀기가 어려웠다.
더러는 화가 나기도 한다.
나라면, 카트를 자기 차 옆에 대고 물건을 싣고 있는 손님 곁에 가서
자기가 카트를 돌려놓겠다고 얘기할 것 같다.
왜냐하면 그 수고의 대가는 100포린트에 달하기 때문이다.
손님들 입장에서는 물건을 싣고 카트를 돌려놓는 것이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기 때문에
충분히 협상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본다.
그 돈(한국 돈으로 500원)이면, 주식으로 먹는 빵을 다섯 개는 살 수 있다.
몇 사람만 협조해 주면, 식료품 값이 저렴한 헝가리에서는 근사한 식탁을 차릴 수도 있다.
그냥 그들이 하염없이 서 있는 것은
내가 생각하는 저러한 구도가 과거에 몇 차례 실패했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이들을 포함해서 헝가리 사람들이
자기를 적극적으로 선전하는 데에는 요령이 없다는 것이 최근의 결론이다.
마켓에서 하는 판촉 행사도 별로 없지만, 판촉 행사를 한다고 해도
담당자들이 그냥 멀뚱멀뚱 서 있는 경우가 더 많다.
이런 풍경은 한국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다.
어제는 마켓에서 집으로 걸어서 돌아가는 길에
아파트 단지의 쓰레기통을 뒤지는 사람을 보았다.
더러는 거지는 아닌 것 같은 사람들이 아이들과 함께
그런 장면을 연출하는 적도 있어서
나는 그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애를 쓴다.
그들도 다소간 어둑할 때 남의 이목을 피해 나온다.
그런데 어제 그 사람은 나에게로 다가왔다.
뜻밖이었다.
그는 애처로운 표정을 지었다.
한 손을 자신의 배로 가져가면서 아주 작은 소리로 얘기를 건네왔다.
나는 무슨 소리인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
물건을 사고 거슬러 받은 동전이 손에 집혔다.
약소했지만 그의 손에 쥐어주었다.
미안했다. 하지만 시장기는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것이었다.
'가난 구제는 나랏님도 못한다'는 한국 속담이 있다.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국민소득이 한국보다 두 배 이상 많은 일본 동경에도
어디서나 그런 구걸자들을 만날 수 있다.
러시아에선 아내에게 이혼 당하고 길거리로 쫓겨난 은퇴자들이 홈리스가 된다 한다.
한국에서는 더러 직업적인 걸인들을 볼 수도 있다.
나는 홈리스를 일거에 해결할 수 있는 어떠한 아이디어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런 능력도 나에게는 없다.
그러나 도움을 바라는 눈빛을 만나면 그것을 회피할 생각은 없다.
헝가리의, 구걸하지 않는 걸인들을 보면서
그 자존심, 그 의연함에 대해서 아직은 이해하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언제든 내 차 옆으로 와서 그냥 밝은 모습으로
카트를 대신 옮겨 놓겠다는 신호를 주면
기꺼이 '쾨세넘(고맙다는 뜻의 헝가리 말)'이라 말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