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귀소(歸巢)

써니케이 2012. 7. 7. 23:20
하루의 해가 저물면, 사람들은 분주히 자기 보금자리로 돌아간다.
어떤 신학자는 그러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고,
인생이 저물 때에 어디로 돌아갈까를 생각하면서 신학의 길로 접어들었다 한다.
흔히 이러한 인간 혹은 동물의 특성을 귀소본능이라 부른다.
동물 중에서 유난히 조류가 이러한 귀소본능을 잘 보이기 때문에 그 말에
새들의 보금자리(巢)라는 글자가 포함된 것이다.

인생은 혈기가 한참 왕성할 때에는 이성을 좇아, 돈을 좇아, 명예를 좇아, 멋진 풍경을 좇아
자의반, 타의반으로 이러저러한 곳을 헤매다가도,
황혼기에 이르면 문득 자기 고향을 떠올린다.
그래서 귀향(歸鄕)이란 말도 하나의 단어로 자리잡았다.
평생을 딴짓하며 살다가 늘그막에 슬그머니 조강지처의 집을 기어드는 남자들도 더러 있다.
보금자리, 그리고 고향은 확실히 사람의 일생에서
평온과 친숙 그리고 안정 같은 어휘와 연결되는 느낌을 준다.

헝가리에서 몇몇 현지인들과 교제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그 중의 몇 사람은 바깥에 살다가 다시 헝가리로 돌아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살았던 곳은, 여기보다 더 선진국들인

영국과 캐나다, 벨기에 같은 곳이었다.

그곳에서 전문직으로 남부럽지 않게 살던 사람들이었다.

조국을 떠날 만한 이유가 있었고, 타국에서 넉넉한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그리 늦은 나이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헝가리로 돌아오는 것은

대체 무슨 까닭이란 말인가?

나 같으면, 그런 경우라면 아이들 교육이란 명분으로 쉽사리 돌아오지 못할 것이다.

앞에 든 나라처럼 의료보장이 잘 되어 있는 국가라면

더더욱 돌아올 생각이 나지 않을 것이다.

해외 체류의 자격 문제도 걸림돌이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고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그 해답은 그들에게 묻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것이기에

나는 조심스럽게 물어 보았다.

"가족(family)"이 정답이었다.

해외에서도 자기 가족들과 함께 살았지만,

이들이 돌아와야 하는 가족은 그 범위가 다소 넓었다.

심지어는 이제 중학교를 막 졸업하는 여자 아이조차도

벨기에보다는 이곳이 좋으며,

그 이유는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친척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당당하게 말하는 것이다.

영국 웨일즈에서 전문의로 일하던 중년 남자는

이제 자기 어머니를 보살펴야 한다면서

헝가리보다 훨씬 높은 급료와 환경을 포기하고 귀국하려 한다.

조국의 공산화 과정에서 핍박을 당하고,

온갖 권리를 앗긴 노인네 한 사람은 캐나다에서 교수직을 던지고

이곳 모하치라는 작은 도시에 자리잡았다.

그곳은 자기네가 대대로 터를 지키고 살아온 곳이었고,

집안 사람들이 터잡고 사는 곳이었다.

그는 인생의 말년에 자기 집안의 가족사를 정리하고 있다고 했다.


원래 대가족제이던 한국은 이제 완전히 핵가족이 되어 버렸고,

심지어는 1인 가정도 적지 않다.

그러나 헝가리에서는 핵가족으로 생활은 하되

명절이나, 이러저러한 기회에 넓은 가족이 모여서 음식을 나누고,

이야기를 하는 것을 큰 즐거움으로 아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는 우리의 명절 분위기와 비슷한 점이 있다.)


가정은 사회의 핵심적인 기초다.

가정이 해체되고 파괴되면 사회가 온전할 수 없다.

가정이 바로서고 질서가 있으면 사회는 건전하게 된다.

헝가리는 비교적 이러한 질서가 있고, 건전한 사회라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순하고, 여유가 있는 것은

그 밑바닥에 가정에 대한 믿음, 가족에 대한 신뢰가 자리잡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연말이면 정해진 기간이 끝나고,

고국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런데 자꾸만 다시 이곳으로 돌아와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든다.

아무래도 이 사람들의 귀소본능이 묘한 방식으로

나를 끌어들이고 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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