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치의 밤문화는 가족 문화다. 오후 여섯시에서 여덟시 사이에 거의 모든 가게가 문을 닫는다. 겨우 맥주집 몇 곳이 문을 열고 있을 뿐이다. 이 시간에 저녁 산책을 하다 보면 대체 이들이 다 어디로 갔을까 싶은 경우가 많다. 가끔씩 동네에서 개 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면, 창틈으로 불빛이 스며 나오는 것을 볼 수 없다면 "오스만 터키가 또 쳐들어 왔나? 그래서 피난들 갔나?" 이런 생각이 자꾸만 든다. 그렇지 않고서야 거리에 사람 그림자가 이렇게나 보이지 않을 도리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모두 그 시간에 집에 있단다. 정말 궁금해서 나에게 한국말을 배우는 안나에게 물어보니 그 시간에 그들은 가족들과 함께 식사하고, 대화하고, 그리고 책을 본다는 것이다. 이 얼마나 이상적인 가정인가? 특히 한국의 가정들이, 아니 가장들이 본받아야 한다.
그러고 보니, 한국에 비해 대중식당이 많지 않았다. 낮에는 비교적 붐비는 식당들도 저녁에는 한가하다. 교외에 차를 끌고 가서 식사할 곳도 별로 없다. 오죽하면 내가 아이들에게, "여기서는 주차장이 있는 식당이 안 보인다."라고 했을까?
주말이면 어쩌다 대중식당에서 가족 단위로 식사하는 모습을 보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대부분 집안 어른의 생신이거나 특별한 기념일 행사처럼 보이는 것은
여느 때보다 말끔한 옷을 차려입고 온 가족이 함께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오래 살고 있는 교민들의 얘기를 들어 보면 그들의 설명은 좀 다르다. 경제 문제 때문이란다. 웬만한 수입으로는 일반 식당의 음식값이 부담이 된다는 것이다. 하긴 점심 특선 정도가 한국 돈 8,000원 내지 12,000원 하니 결코 만만치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게다가 거의 의무적으로 마실 것을 주문해야 하고 곳에 따라서는 10% 남짓의 팁까지 챙겨 주려면 가족 전체의 음식값을 지불해야 하는 가장의 손이 떨리지 않을 수 없을 것이었다. 굳이 식당에 가지 않더라도, 좋고 풍부한 식재료를 가지고 조금만 신경을 써서 요리하면 가족들이 편안하게 먹을 수 있는데
굳이 비싼 식당에 갈 필요가 없는 것이다.
한국에서의 관점은 이와는 다르다. 소위 '회식'이라는 것의 의미를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 자리에 둘러앉아서 함께 식사를 하고 더 나아가 술 잔이라도 기울이게 된다면
그 구성원들의 연대감을 높일 수 있다는 생각에 한국에서는 거의 모든 집단과 단위에서 회식을 한다. 그리고 그런 자리를 위해서 친절하게 예산까지 편성해 놓는다.
순전히 개인 돈으로 회식하자고 하면 그 참석자 수는 절반으로 줄어들 것이 뻔하다.
헝가리에 온 지 두 달쯤 지났을 때, 그냥 무심코 저울에 올라간 적이 있다. 저울 눈을 보는 순간 나는 내 눈을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상에, 내 몸에서 8kg의 소중한 한국산 지방이 어디론가 떠나 버린 것이다.
하긴 거울에 비친 내 얼굴이 무언가 야위는 듯한 느낌을 가졌고, 허리띠는 이미 한 구멍을 줄안 터였다.
한국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현실이었다.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식구들은 시기 반, 걱정 반으로 염려한다. (왜 시기하느냐 하면, 그들도 다이어트에 열중하고 있었지만 효과가 미미했기 때문이었다.)
혹시 몸에 무슨 안 좋은 병이라도....
두어 달 만에 특별한 요법이나 처방 없이 그렇게 살이 빠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인생의 후반기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결코 흘려 들을 수만은 없었다. 대체 왜 이렇게 살이 빠졌단 말인가? 나는 내 생활 패턴과 식사 습관 및 평소의 열량 섭취 등의 상관관계에 대한 연구에 착수했다.
나는 무척 건강하며, 내 체중 감소의 이유는 바로 이것이다, 그리고는 자랑스럽게 '체중으로 고통 받는 형제여, 나를 따르라.'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한국 사람 열이면 여덟 명이 관심을 가지는 문제에 대해 나는 해답을 찾았다. 회식! 바로 그것이었다. 예수님도 회식을 하셨지만, 3년의 공생애 끝에 딱 한 번 하셨다고 성경에 나온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회식이 없는 주가 없었다. 그리고 나 스스로가 그 회식 모임의 주관자이기도 했다.
회식은 외식이다. 워낙 보릿고개 얘기를 들으며 자랐던 몸이라서 음식 남기는 것을 죄악으로 생각하기에 나오는 음식을 깨끗이 비우는 것을 미덕으로 알았다. 덕분에 살이 찌지 않을 수 없었다.
게다가 한국 식당은 이미 거의 모든 반찬을 넣어서 비벼 먹는 비빔밥 상차림에도 온갖 반찬이 함께 나오니 아주 배불리 먹게 된다. 그리고 그 회식이며 외식이 거의 저녁 식사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에너지를 소비할 틈이 없이 그냥 살로 가게 되는 것이다.
아내와 아이들은 나의 변명에 수긍했다. 나는 어느 틈에 혈압약을 멀리 치워 버리고 말았다. 본태성이 아니기에, 체중 감소로 혈관이 받는 압력이 줄어든 것이다.
처음에 왔을 때는, 한국과 이곳의 피자 값을 비교하면서 이렇게 싸고 맛있다면 날마다 시켜 먹어도 되겠다고 호기를 부리던 나였지만 이제는 줄어든 체중 유지에 더 신경을 쓰고 있다.
한 번 왈칵 체중이 줄어든 이후에는 그냥 그 체중을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서 체중 감소의 다른 이유는 없는 것으로 알고 잃어버린 한국산 지방에 대한 미련을 떨쳐버리고, 헝가리산 근육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가족 문화와 가정 식사의 중요함을 깨닫게 해 준 이곳 생활에 대해 매우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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