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하늘의 뜻

써니케이 2014. 9. 22. 22:20
내가 여닫을 수 있는 창문이 세 개나 된다.
전용모니터도 있다. 앞사람 의자에 붙어있는 코딱지만 한 것이 아니라 그보다 세 배는 큰 거다.
버튼만 누르면 의자가 침대로 변한다.
좌석 간격이 넓으니 옆사람 신경쓸 필요 없이 신문을 봐도 되고 화장실을 들낙거려도 된다.
앞사람이 좌석을 뒤로 눕히든 말든 상관없다.
내 전용 테이블은 정확히 자기 공간에 있다.
비행기 탄 지 25년만의 처음 일이다.

그렇다. 비행기를 타는 모든 사람이 부러워하는 일등석의 환경이다.
나는 학교 다닐 때 늘 이등 정도만 해서 지금까지 아니 정확히 어제까지 한번도 일등석에 앉아본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항공사에서는 정말 야속하게도 탑승할 때나 내릴 때 꼭 일등석을 거쳐가도록 좌석 배치를 한다.
10시간 이상 비행기를 타고나서 몸의 모든 근육이 굳어버린 채로 짐을 챙겨 내리다보면 눈을 번쩍 뜨이게 만드는 그 일등석 말이다.
특별히 제공한 슬리퍼가 어지럽게 널려 있는 그 호사스러운 공간 말이다.
좌석의 호사를 누리는 데는 학교 성적이 아니라 이코노미석의 두 배가 넘는 금전의 힘이 필요하다. 
더러는 마일리지로 등급을 올리기도 하지만 결국은 돈이다.
사흘간의 일정을 마치고 중국 수도공항 KAL 카운터에서 체크인을 하고 탑승권을 받아 든 나는 뭔가 모를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11J라......
뭐지? 좌석 번호체계가 바뀌었나?
대한항공에서 전산시스템이 변경 되었다며 혹시 모르니 공항에 일찍 나와달라는 문자를 받았는데 그때문일까?
탑승장 창밖에는 나를 싣고 갈 B747-400이 위용을 자랑하고 있었다.
이미 예약 발권 할 때부터 30번째 줄쯤에 창문쪽으로 좌석을 정해놓고 있었기 때문에 체크인 카운터에서 창문쪽이라고 확인할 때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
747 앞에서부터 창문번호를 1, 2, 3... 세어보니 아무래도 일등석 위치로 보였다.
맞았다.
두 번째 영역의 일등석이었다.

우후! 하는 탄성이 아니라 애개! 하는 아쉬움의 표시만 할 것 같았다.
승무원이 전산 착오라면서 저 뒤로 옮기라고 말할 것만 같았다.
나는 그냥 될대로 되라 하는 심정으로 좌석벨트를 단단히 조였다.
버틸 심산이었다.
그런데 모든 승객이 다 탔는데도 승무원이 별 눈치를 주지 않는다.
그리고 보잉747은 어느새 활주로를 힘차게 달리고 있었다.
나는 드디어 일등석 손님이 된 것이다.

항공사의 운영은 백화점이나 수퍼의 운영과는 많이 다르다.
절대로 차액 보상 같은 정책은 시행하지 않는다.
티켓값이 항공요금과 유류할증료와 세금 같은 것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은 알지만 정가가 얼마인지 권장소비자 가격이 얼마인지 몇 퍼센트 할인해주는지는 도통 알 수 없다.
그리고도 비행기 표를 사는 경로에 따라서, 사는 시기에 따라서 가격이 들쑥날쑥이다.
같은 노선을 다니는 항공사마다도 요금이 다르지만, 한 비행기에 탄 사람들도 서로 다른 요금을 낸다고 한다.
얼마를 냈는지 알게 되면 불편하니까 서로 말하지 않는 것이 예의다.
이등석 표를 끊은 사람이 일등석을 타는 경우는 좌석을 초과배정했을 때라고 한다.
오늘 나도 오버부킹의 덕을 본 것일까?
체크인 카운터의 아가씨가 절대로 생색내는 표정도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었을까?

김포에 도착하기 전에 결론을 냈다.
하늘의 뜻이다.
하늘의 교통길을 다니는 항공사 마음대로다.
그냥 대한항공의 고마운 농간(?)이다.
글 쓰는 나에게 소재를 하나 던진 것이다.

(2014.9.21. KAL 2582편 11J에서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