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이야기

밀어서 안 되면 당겨라

써니케이 2017. 1. 9. 19:30

일생에 여러 공부를 했고, 많은 스승을 만났다. 정규 학교 밖에서도 그런 스승은 여러 번 만났다. 운전면허 시험에 통과하고 도로교통안전협회의 안전교육에서도 인생의 지침을 준 강사를 만났고, 여행 가이드 중에도 그런 분이 있었다.
1996년 여름에 나는 처음으로 미국에 가보았는데, 거기서 만난 여행 가이드가 나에게 감명을 준 분이었다. 가족 해외여행도 처음이었고, 패키지 여행도 처음이었다. 낯선 곳에서 버스를 타고 여러 시간을 이동하면서 이런 저런 지역의 숙박시설을 이용하게 되었다. 현지 가이드로 나선 분이 만나자마자 여행과 관련된 전반적인 안내를 했다. 미국 생활과 관련된 일반적인 내용들이라 생소한 것도 있었고, 이미 알고 있는 내용도 있었다.
30대의 활발한 가이드 선생은 첫날 숙소에 도착하기에 앞서 중요한 사항이라며 두 번 세 번 강조하며 설명한 것이 있었다. 그것은 숙소의 방, 특히 화장실 사용법 중에 수도꼭지를 어떻게 사용해야 하는지를 자세히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설명이 좀 묘했다. 제발 수도꼭지와 관련해서는 가이드를 찾지 말아 달라는 것이다.
설명인 즉, 화장실의 수도꼭지는 숙소마다 다를 수 있다는 것이다. 수도꼭지를 열 때, 꼭지를 돌리는 것도 있고(그것도 왼쪽인 경우도, 오른쪽인 경우도 있단다), 손잡이를 미는 것도, 당기는 것도 있으며, 손잡이를 뽑는 것도 누르는 것도 있다는 것이다. 온수와 냉수를 다루는 방법도 수도꼭지에 따라 다르다고 한다. 이번 숙소에 어떤 수도꼭지가 있는지는 가이드인 자기도 모르니, 이런 저런 방법을 다 해 보라는 것이다.
어찌 보면 참 무책임한 가이드다 하는 생각이 들 수도 있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이 가이드 선생이 그 동안 얼마나 여행객들로부터 불평을 들었나 하는 것도 짐작할 수 있었다. 돌려라, 아니면 밀어라, 아니면 꺾어라, 아니면 당겨라, 아니면 뽑아라, 아니면 눌러라... 가이드의 권유는 7박9일의 여행 기간 내내 아주 유용한 지침이 되었다. 정말 호텔마다 손잡이가 다 달랐던 것이다. 그때 우리나라에서도 손잡이를 밀거나 아래로 누르는 선택을 하기는 했지만, 미국에서는 주마다, 아니 카운티마다 달랐다. 미국이 개성을 존중하는 사회라더니 수도꼭지조차 그런가 싶었다.
나는 그 가이드의 말씀을 성경 말씀처럼 새기고, 그 이후로 여러 차례 외국 여행을 하면서 금과옥조처럼 적용하였다. 그리고는 정말 일생의 교훈임에 틀림없었다.

지금으로부터 3년 남짓 전, 2013년 11월에 박 대통령은 영국을 국빈으로 방문하였다. 여왕이 산다는 버킹검 궁전이 숙소로 정해졌지만 첫날 저녁은 너무 늦게 도착한 탓에 시내의 호텔에서 머물게 되었다고 한다. 이때에 대통령은 여러 에피소드를 남긴 모양이다. 이 에피소드라는 것이 뭐 훈훈한 미담 같은 것이 아니고, 일반인의 상식에서 벗어난 이야기라고 한다. 탄핵 국면에서 업무에서 배제되어 힘을 잃어버린 대통령으로 전락하다 보니, 비밀로 감추어져야 할 사연들이 삐져나오는 가운데, 그런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겨우 몇 시간 머물 호텔 방에 이런저런 집기를 옮겨놓았다든지, 엄청난 조명을 설치했다든지 하는 것도 신기했지만, 무엇보다도 호텔방의 온갖 스위치와 화장실 손잡이 등에 그 사용법을 소상하게 적어 두었다는 것은 정말 듣도 보도 못한 이야기였다.
물론 청와대의 것과 다를 수 있다. 영국은 240V에 50Hz의 전기를 쓰면서 콘센트 모양도 우리나라의 것과 확연히 다르다. 게다가 자동차도 왼쪽으로 달리고, 영어를 쓴다. 뭐 대통령이 콘센트를 직접 사용할 것 같지는 않지만 만일 뭘 잘못 건드리면 감전될 수도 있다. 비상상황에서 영어를 써야 한다는 것도 참 고약한 문제다.
그러니 만사는 불여튼튼이라, 돌다리도 두들겨야 한다. 국가 원수에게는 더욱 그렇다. 국정 챙기랴, 외국에 분주한 대통령에게 스위치를 어떻게 트는지, 손잡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를 가지고 신경 쓰게 하는 것은 불경스러운 일일 것이다. 대통령에게 따뜻한 물이 필요하면 한 번의 동작만으로 원하는 결과가 나와야 한다. 저쪽 눈에 거슬리는 스탠드 램프를 끌 때는 방 안의 수많은 스위치 중에 어떤 것을 어떻게 건들어야 하는지를 분명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거기서 시간을 낭비하고 있으면 안 된다.
대통령 자신의 선택인지, 보좌진의 충정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들의 준비는 결코 나쁘지 않았다. 매사에 그렇게 철저하게 준비하고, 판단하는 태도는 국가지도자에게는 덕목이 될 수도 있다. 그렇게 인정하더라도 뭐가 찜찜한 게 있다.
나랏일이라는 게, 국제사회의 상황이라는 것이 그렇게 미리 준비한 일만, 예상하고 대비한 상황만 일어나는 것인가? 헤어드라이어를 220V/110V 겸용으로 새로 사서 외국 여행을 갔는데, 뜻하지 않게 전원 선택을 잘못 해서 태워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영국에 갔는데 결국 콘센트가 맞지 않아서 사용 못할 수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객실에 비치된 사용설명서를 잘 읽어 보면 호텔 프런트에서 콘센트 변환용 어댑터를 빌려준다거나, 아예 헤어드라이어를 빌려준다는 구절이 있을 수 있다. 인간사는 이렇게 저렇게 해결해 나갈 수가 있다. 내가 불편을 겪은 일에 다른 사람도 불편했을 수 있고, 그러한 불편에 대처할 길도 마련되어 있을 수가 있는 것이다.
우리 대통령이 그 무렵에 미국 서부 여행을 했어야 한다는 생각이 이제 간절하다. 거기서 그 버스 간에서 그 가이드 선생의 얘기를 들었어야 한다. 밀어서 안 되면 당기고, 눌러서 안 되면 뽑으라는 그 여유만만한 요령을 배웠어야 한다. 뭐 그까짓 일로 수행원들에게 일일이 사용법을 써서 붙이라는 지시를 내리지 말았어야 한다. 아무리 궁전에서만 살았더라도, 늘 다른 사람들의 챙김을 받았더라도, 스스로 혼자 사는 법을 아울러 익혔어야 한다. 혹시 앞으로 예상되는 혼자 사는 일이 두려워서 이분이 지금 사는 곳을 벗어나지 않으려 하는지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