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 이야기

손금 본 이야기 - 문필가가 되리라

써니케이 2006. 5. 12. 22:32

초등학교 5학년 때, 우리 집은 신광교회 사거리에 있었다.

중앙시장에도 가게가 있었고,

그 사거리에도 가게가 있었다.

(장사가 잘 되어 가게를 두 개씩이나 벌인 것이 아니다. 그 반대다.)

그 가게에 바로 옆에는 팔봉이나 금마로 가는 시내버스 정류장이 있었다.

정류장이라는 게 오늘날처럼 비를 피할 수 있는 시설이 따로 있는 곳이 아니었다.

벤치 하나도 없이 그냥 길에 표지판만 세워두었을 뿐이었다.

언제 올지 모르는 버스를 기다리며

사람들은 그냥 길가에 쪼그리거나 주저앉기 마련이다.

그래서 그럭저럭 우리 가게로 들어온다.

허름한 나무 의자라도 있기 때문이고,

비와 바람을 피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겨울이면 연탄 난로라도 쬘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날 내가 가게를 보고 있던 때였다.

어떤 노인이 안으로 들어오셨다.

의자에 앉아서 하염없이 시내버스를 기다리고 있다가는

이 노인네가 나더러 손금을 보자고 하신다.

무슨 일인가 싶었다.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아마도 60대 초반쯤 되는 분이었을 것이다.)

일면식도 없는 분이 대뜸 손금을 보자 하니,

그냥 손을 내밀기가 뭐했다.

게다가 손금 보는 일이 무슨 미신 같이 느껴지기도 했었다.


하지만 그 노인과 마찬가지로 하릴없이 앉아 있던

나에게 그 노인의 제안이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그 분의 말대로 왼손을 내밀었다.

노인은 유심히 내 손바닥의 골짜기들을 짚어 나갔다.

그리고는 한 마디 하신다.

‘글을 써서 먹고 살겠구나!’


나는 그때 아마도 ‘서울 공대를 가겠구나!’ 이런 말을 듣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전혀 엉뚱한 말씀을 하시는 것이다.

믿을 수도 없고, 또 그 말의 의미가 모호하기도 해서

그게 무슨 말인지 확인해 보았다.

“글씨를 잘 쓴다는 말이지요? 서예가 같은……”

그 무렵 나는 서예반에 있었고,

내 스스로도 글씨를 잘 쓴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뜻이라면 접수할 수 있었다.


“그런 것이 아니고, 문장가가 되겠다는 것이야!”

나는 그 노인의 말씀을 그냥 믿거나 말거나로 치부해 버리고 말았다.

전혀 그럴 일이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초등학교 때, 결코 나는 글을 잘 쓰는 축에 들지 못했다.

백일장에도 나가 본 적이 없었다.

실없는 노인네가 그냥 앉아서 기다리기 미안하니,

격려의 말을 하는 거였겠지 싶었다.


하지만 결국 일이 꼬이고 말았다. 그 노인 때문이리라.

그 노인의 말씀이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라는 사실이

4년쯤 후에 드러난 것이다.

중학교 2학년 때 우연한 기회에 이리시의 백일장에 나갔다가

장원을 하게 되었다. 중3 때는 자그마한 소설도 교지에 실었다.

고등학교에서는 다른 선택이 없었다.

백일장마다 그냥 휩쓸었다. 남성학보를 혼자 만들다시피 했고, 남성문학상도 탔다.

(나때문에 한 친구의 인생도 꼬였다. 나 이전에 장원을 독차지하던

P 군은 결국 문학의 길을 접었고, 대신 키를 키워 준다는 한의사가 되어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있다. 꼬여도 아주 잘 꼬인 셈이지…….)


대학의 전공을 선택하는데도 어려움이 없었다.

당연히 국문과에 갔고, 또 약관 1학년 때 그 대학의 문학상을 거머쥐었던 것이다.

작가의 길은 이제 내 앞에 놓인 유일한 길이거니 생각했으나,

약간 옆길로 옮기고 말았다.

대학원을 다닌 후부터는 그냥 학문의 영역에 안주하고 있는 것이다.

창작과 연구를 병행하고 있는 작가 교수들을 보면서

‘그들이야말로 진정한 천재’라고 약간은 비웃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며

존경의 마음을 표시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나는 글이 쓰고 싶다. 배가 고프다.

글 쓰는 일을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라 여기고 있다.

정식으로 등단한 일은 없지만,

그리고 손금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거나, 절대로 믿지도 않지만

나는 지금도 그 노인의 말씀을 자기 암시처럼 되뇌곤 한다.

그러한 긍정적 자기 암시는 인생을 살아가는 데 퍽 유익한 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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