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17일자 이후로 내 신분에 한두 가지 변화가 생겼다.
첫째는 내가 드디어 고아(孤兒)가 되었고, 둘째는 호주(戶主)가 되었다는 것이다.
'고아'는 부모를 여의었거나 부모가 양육을 포기하고 버린 자식을 일컫는 말이다.
우리 사전에는 '부모'를 모두 다 여의어야 하는지, 어느 한쪽만 여의어도 되는지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다.
예전에는 아버지의 상중에 있을 때, 스스로를 고자(孤子)라 하였고, 어머니의 상중에는 애자(哀子)라 하였다 한다.
부모 모두를 잃게 될 때에는 고애자(孤哀子)가 되었다.
영어의 'orphan'은 어느 한쪽 부모만 계시지 않아도 적용할 수 있다고 한다.
법적인 설명이 어떠하든지, 사전에 무어라 했든지 간에, 내 스스로 이미 고아가 되어 있음을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비록 어머니는 생존해 계시지만, 내색도 없으시지만 그 역시 미망(未亡)의 충격은 결코 적지 않을 것이다.
어떤 존재라 하더라도 그 존재의 서거(逝去)는 기존 관계의 모든 부문에 걸쳐서 영향을 미친다.
가장 근접해 있는 가족은 정통으로 그 영향의 폭탄을 맞게 되어 있다.
나는 장례의 절차를 거치는 동안에 내내 침착했다.
그렇게 애를 썼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우리 식구들도 모두 오래 전부터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얼마 전부터는 "아버지가 계시는 것과 계시지 않는 것 사이에 어떤 다름이 있으리요?" 라는 불경스런 느낌마저 들었다.
그렇게 아버지의 쇠진을 당연하게 여겼고, 차츰 부정(父情)을 부인하고만 있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돌아가시기 불과 몇 시간 전에도 링거를 맞으러 병원 계단을 오르내릴 때 내 등에서 내 목을 꽉 조일 정도로 힘차게 붙들고 있었다.
링거를 맞는 병상에서 사돈댁이 문병할 때에 참으로 미안하여 몸을 어찌할 바 모르는 듯한 표정을 지으셨다.
어둔하기는 했어도 '배 고프다'는 의사 표시도 하셨다.
동생 집으로 돌아와 어머니가 떠넣어 주시는 죽으로 저녁 식사도 제법 하셨다.
며칠 간을 통원 치료를 하면 좋아지겠다는 의사의 말도 있었고, 실제로도 한결 핏기가 도는 모습이 보여, 일단 나는 분당으로 되돌아왔다.
그리고는 동생 네와 담소하는 가운데 (물론 듣기만 하셨겠지만) 조용히 숨을 거두신 것이다.
장례의 모든 절차가 은혜로웠고, 순조로웠다.
과분하게도 많은 분들이 찾아주셨고, 멀리 계신 분들도 위로의 뜻을 전해 오셨다.
특히 정말 오랫만에 우리 동문 친구들이 찾아준 것은 너무나도 고마웠다.
나는 맏상주로서 조문객 모두를 빠짐없이 맞이했다.
침착했다. 찬송을 부르면서 가끔씩 눈물만 훔칠 뿐이었다.
장례를 마친 다음 날 아침에 나는 한번 울었다.
인근 온천의 건식 사우나에 들어가서 아무도 보지 않는 데서 그냥 한번 목을 놓았다.
매제가 사우나에 들어오지 않았다면 좀 길게 울었을지 모른다.
고아가 된 것이다.
이제 언제 다시 울 날이 올지 모르겠다.
어머니가 돌아가신다 하여도 아버지 때와 별다르지 않을 듯하다.
나는 울음 대신 아버지 이야기를 쓰고 싶다.
고아의 한탄과 회한이 아니라 주인공인 소박한 장로님의 가슴 따뜻한 이야기의 실마리를 풀어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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