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詩)이길 원하는 글들

빛과 생명에 관한 에피소드

써니케이 2006. 5. 6. 13:38

    I.

    염천의 포도를
    맨발의 아이들이
    서성이고 있었다.

    때 절은 손에는 부서진
    거울 조각
    한 웅큼의 광편을 쥐고
    있었다.

    사람들은 부끄러워
    눈을 돌리거나
    도망하기
    시작했다.

    해 넘어간 저녁
    아이들은 할 일이
    없어졌다.

    - 무대는
    어둑한 그림자

     

    II.

    시장통 저물은 네거리,
    소경 일가가 구걸하고 있었다.

    남자가 빛 바랜 만도린을 퉁기고,
    여자는 구식 축음기마냥 노랠 불렀다.

    아이들이 그 노래에 이끌려
    찾아 와서는 혀를
    끌끌거렸다. 손에 쥐고 있던
    거울 조각을 아예 박살내고는
    하나씩 하나씩 여자의
    동전 그릇에 던져 주었다.

    쩔컹쩔컹......
    소리 때마다 여자는
    연신 허릴 굽혔다.

    등에 업힌 여자의
    어린아이의 눈웃음이 너무도
    기분 좋은 것이었으므로
    아이들이 그 짓을
    그만 둘 수 없는
    노릇이었다.

     

    III.

    시립병원의 대기실에서 차례를 기다리던
    눈이 무척 맑은 소년을 만난 적이 있다.
    늑막염을 앓고 있는 그는 기다림의 무료함을
    메우기 위해서인지 바지 주머니에서 꼬깃꼬깃
    접혀진 종이를 꺼냈다. 그것은 나부가 원색으로
    그려진 외국 도색잡지의 표지였다. 음탕한
    녀석이다. 소년은 아무런 표정도 없이 아무데고
    함부로 더듬었다. 살짝 웃었다.
    그리고는 이내 떠듬떠듬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저 사람이 누구 죄..로 소경..되었습니..까?.."

    밝음과 어두움만을 겨우 구별하는 소경 소년을
    만난 적이 있었다.

    *요한복음 9장

     

    IV.

    노을이 너무도
    붉게 물들어 있었다.

    호세의 안경 쓴 내외가
    노래 부르고 있었다. 별로
    단정치 않은 여자 하나이
    삼박자의 스텝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연미복의 신사가
    그의 앞에 있으련만 사람들 눈엔,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비가 내릴 것이라고, 틀림없다고 그들은
    하나씩 흩어져 갔다.

    남자는 기타를 뜯고
    아내는 목청을 돋구고
    여자는 왈츠를 추었다.

    .....F.O.

     

    [1979년2월의 시화전에 출품한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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